석왕사(釋王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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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석왕사 |
한글표제 | 석왕사 |
한자표제 | 釋王寺 |
상위어 | 선종(禪宗), 삼십육사(三十六寺) |
관련어 | 청허휴정(淸虛休靜), 설봉산석왕사기(雪峰山釋王寺記), 나한재(羅漢齋), 시왕재(十王齋), 보우(普雨), 선종(禪宗), 어제어필비(御製御筆碑), 무학자초(無學自超)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강호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석왕사(釋王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7년 8월 19일, 『세종실록』 6년 4월 5일, 『세종실록』 10년 9월 20일, 『세종실록』 7년 3월 8일, 『명종실록』 6년 4월 14일, 『영조실록』 9년 4월 16일, 『정조실록』 14년 8월 21일, 『정조실록』 15년 4월 17일, 『정조실록』 16년 윤4월 24일, 『순조실록』 10년 8월 19일, 『순조실록』 10년 10월 16일, 『고종실록』 16년 3월 25일, 『순종실록부록』 5년 3월 1일, 『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15일, 『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23일, 『순종실록부록』 10년 6월 2일 |
함경남도 안변군설봉산(雪峯山)에 위치한 이성계의 원찰로, 세종대 36사 중 선종에 속한 절.
개설
석왕사(釋王寺)는 사찰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잠저 시절부터 원찰로 삼았던 절이다. 이성계가 왕업을 시작한 곳이라 하여 조선시대 내내 왕실로부터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이후에도 왕실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역대 임금의 어제어필비가 세워져 있었고, 조선 건국 후 태조의 대대적인 중창 이후에도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왕실에서 중창하였다.
변천 및 특징
(1) 창건
석왕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청허휴정(淸虛休靜)이 찬술한 「설봉산석왕사기(雪峰山釋王寺記)」에 의거하여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인 1380년경 안변설봉산 토굴에서 무학자초와 만났으며 조선 건국 후 태조가 이곳에 석왕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 의하면, 설봉산 토굴에서 9년간 수도하던 자초는 이성계가 1384년(고려 우왕 10)에 금마(金馬)에서 와 살다가 무너진 집에서 서까래 3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자초는 이 꿈을 이성계가 장차 왕이 될 징조라고 해석하고, 1년 내에 석왕사를 짓고 3년 내에 오백나한재를 지내 공덕을 쌓으면 자신도 왕업을 돕겠다고 하였다. 이성계가 자초의 말대로 실천하여 마침내 조선을 창업하고, 설봉산 토굴로 자초를 찾아와 왕사로 봉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처음 확인되는 석왕사 관련 기록은 1398년(태조 7) 8월 태조이성계의 3대조인 환조(桓祖)·도조(度祖)·익조(翼祖)를 위한 삼성재(三聖齋)를 석왕사에서 설행했다는 것이다(『태조실록』 7년 8월 19일). 이로 미루어 1398년에는 이미 석왕사가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권근(權近)이 태조의 명을 받들어 찬술한 복장 발원문에 의하면, 안변 석왕사는 예로부터 진병(鎭兵)을 비보(裨補)하는 곳이라 하였고, 또한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원찰로 삼고 새로 중수했다고 하였다. 석왕사는 조선 건국 전부터 이성계의 원찰로 한차례 중수를 거쳤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당주로 비로자나불을 봉안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태조가 즉위하고 나서 국왕의 원찰로 다시 중수했던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새로 중수한 석왕사에는 삼천불, 석가삼존불, 비로자나삼존불, 지장보살, 시왕의 그림을 조성하였고, 돌로 오백나한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 비로자나불의 보처보살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나무로 조각하여 봉안하면서 발원문을 써서 새로 조성한 보살상에 복장(腹藏)으로 봉안했다고 한다.
1424년(세종 6) 기존의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고 각각 18개 사찰씩 모두 36개의 사찰만 공인할 때 석왕사는 선종 18사 중 하나가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건국 이후 태조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던 만큼 그에 따라 전지도 주어졌을 것인데, 1424년 공인 당시 석왕사가 소유한 토지는 200결이었다고 한다. 세종은 여기에 50결을 추가로 내려주었고, 120명의 승려가 거주할 수 있게 하였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1428년(세종 10)의 예조에서 세종에게 보고한 것에 의하면 이 200결은 속전(屬田) 100결과 나한재 및 시왕재의 비용을 충당하라는 뜻으로 지급하는 위전(位田) 각 50결씩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세종은 이 두 위전을 혁파하자는 예조의 청을 받아들였다(『세종실록』 10년 9월 20일). 한편 석왕사에서는 태조와 원종공신들이 시납한 곡식으로 보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수납을 담당할 관리를 매년 보내고 노비 10명으로 하여금 감수(監守)하게 하였다(『세종실록』 7년 3월 8일).
세종대 이후 석왕사에 대한 언급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오지 않다가 명종대에 다시 등장한다. 명종 즉위년 계림군(鷄林君)이유(李瑠)가 모반으로 처벌되는데, 6년이 지난 1551년(명종 6) 보우(普雨)가 이유를 숨겨주고 그를 위해 재를 올렸다는 함경어사의 보고가 올라왔으나 명종은 근거 없다 하여 보우를 처벌하지 않았다(『명종실록』 6년 4월 14일).
(2) 조선후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퇴락한 뒤 중창되지 못하고 폐사된 여타의 왕실원당과 달리 석왕사는 왕업을 시작한 곳이라 하여 조선후기에도 국가적으로 특별히 중시하고 관리하였다. 1733년(영조 9)에는 장령김정윤(金廷潤)이 올린 상소를 통해 태조가 잠저 시절 직접 심었다는 석왕사 배를 진상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면 이미 배나무가 말라 죽어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승도들이 해마다 사서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9년 4월 16일).
특히 정조는 석왕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 석왕사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는데, 이때 정조의 하교는 다른 사료에는 전하지 않는 석왕사 연혁이 설명돼 있어 의미가 있다. 하교에 의하면, 조선초 어필(御筆) 판각이 봉안되어 있었고, 선대왕 때에도 모두 어필 비문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1608년(선조 41) 인목대비(仁穆大妃), 1728년(영조 4) 인원대비(仁元大妃), 1788년(정조 12)에는 정순왕후(貞純王后)가 각각 석왕사를 중수하였다고 하며, 정조는 선대왕의 고사를 계승하는 뜻으로 직접 기문을 짓고 비를 세우겠다고 하였다(『정조실록』 14년 8월 21일). 이듬해 정조가 쓴 어제비문이 숙종과 영조의 어제비와 함께 나란히 석왕사에 세워지게 되었다(『정조실록』 15년 4월 17일).
1792년(정조 16)에는 예조판서 서호수(徐浩修)가 석왕사 중들의 청을 대신 아뢰었다. 그에 의하면, 석왕사 중들은 석왕사 토굴이 있던 터에 자그마한 무학 대사의 초상이 있는데, 휴정과 유정은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사당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한 데 비해 무학은 나라를 세운 데 큰 공이 있는 개국원훈(開國元勳)임에도 전적으로 봉향(奉享)하는 곳이 없으니 토굴에 초상을 모사한 것을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지낼 것을 정조로부터 허락받고자 했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밀양 표충사와 해남 대둔사의 전례에 따라 ‘석왕(釋王)’이라 사액하고, 무학에게 대사의 호를 추증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4일). 태조가 왕업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진 석왕사에 대한 이러한 정조의 조처는 정조가 추구했던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왕실에서 지속적으로 석왕사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면서 석왕사는 조선후기에도 함경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건재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16~19세기에 걸쳐 석왕사에서 지속적으로 불서가 간행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1681년 6월 일본으로 가던 중국 상선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에 표류하면서 전해진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 중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과 『성상통설(性相通說)』을 1750년 석왕사에서 함월해원(涵月海源)이 합간(合刊)한 것은 조선후기 불서의 유통과 교학의 전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순조대에는 석왕사에서 산사태가 나서 어실각(御室閣)과 용비루(龍飛樓)가 무너져(『순조실록』 10년 8월 19일), 중수 비용 20,000냥과 공명첩 1,000장을 주어 중수토록 하였다(『순조실록』 10년 10월 16일). 또한 고종대에는 석왕사의 신주를 봉안한 정전(正殿)과 어제어필비각(御製御筆碑閣) 등이 마모되고 비가 새고 무너진 곳이 많아 수리해야 하므로 전례에 따라 공명첩 300장을 만들어 공사를 시작하게 해 달라는 내수사의 요청을 허락하여 고종대 석왕사는 한 차례 더 왕실의 후원으로 중수되었다(『고종실록』 16년 3월 25일).
(3) 일제강점기
석왕사에 대한 왕실의 관심과 제향은 한일합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12년 석왕사 태조 감실에서의 탄실일과 사절일(四節日)의 제향 비용을 이왕직(李王職)에서 지불하였고(『순종실록부록』 5년 3월 1일), 1917년에는 순종이 직접 석왕사에 들러 하루 묵으며 어필각과 태조가 직접 심은 소나무 등을 돌아보았다(『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15일). 그리고 1917년에 석왕사에서는 지공, 나옹, 무학의 3법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고(『순종실록부록』 10년 5월 23일), 비각을 건축하기도 하였다(『순종실록부록』 10년 6월 2일). 일제강점기이기도 한 이 시기 석왕사는 31본산 중 하나로 48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한국전쟁 중 절이 크게 파괴되었다.
참고문헌
- 『양촌집(陽村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 황인규, 『무학대사 연구』, 혜안,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