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승(赴役僧)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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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부역승 |
한글표제 | 부역승 |
한자표제 | 赴役僧 |
관련어 | 무도첩승(無度牒僧), 승군(僧軍), 승역(僧役), 의승방번(義僧防番), 의승(義僧), 도첩제(度牒制), 도승(度僧), 승인호패제(僧人戶牌制)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직역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부역승(赴役僧) |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차원의 대규모 토목 공사나 토산품의 생산 및 납부 등에 동원된 승려.
개설
부역(賦役)은 국가나 공공 단체가 특정한 공익사업을 위해 국민에게 보수 없이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勞役)을 말한다. 조선초기부터 승려를 각종 부역에 동원하는 대신 승려의 신분증명서인 도첩(度牒)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출가를 제한하여 승려의 수를 줄이려 한 억불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는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승려를 산성의 축조와 방어, 토산품의 생산 및 납부 등 각종 부역에 동원하고 그 대가를 지급하였다. 이처럼 각종 부역에 동원된 승려들을 부역승(赴役僧)이라고 한다.
내용 및 변천
조선 왕조가 성립된 이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은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사찰에 속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한 것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출가를 제한하여 승려의 수를 줄이려 한 것은 양역(良役) 자원 즉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다. 국가에서 승려 허가증을 발급하는 도첩제(度牒制)와 승인호패제(僧人戶牌制) 등도 모두 이러한 국가 시책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승려를 각종 부역에 동원하고 그 대가로 도첩을 지급하는 등의 일이 잦았으므로, 승려의 수는 꾸준히 유지되었다. 1436년(세종 18)에 흥천사(興天寺)를 중수할 때는 30일간의 부역이 끝나자 600명의 부역승에게 도첩을 주었다. 또 1483년(성종 14)에 시작된 창경궁 공사 때는 도첩이 없는 2,000명의 승려에게 부역을 시키는 대신 4,000명에게 도첩을 주어 유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다 중종 연간에 들어와서는 도첩이 없는 무도첩승을 환속시키고, 도첩을 지닌 승려라 할지라도 국가에서 시행하는 토목 공사에 의무적으로 종사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승려들은 부역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일반 백성의 부역을 줄이고, 국가에서 임의로 동원할 수 있는 무보수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후기에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란은 국토를 황폐화시켰으며, 빈번한 자연재해는 기근과 전염병을 초래해 인구가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16~17세기 생산 구조의 파괴와 국가 재정의 부족은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각종 부역의 증가로 이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양역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급기야 승려에게 각종 잡역(雜役)과 공물(貢物) 납부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산성의 축조와 방어는 전란 이후에 승려가 감당해야 했던 부역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인조대에는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 삼남 지방과 강원도의 승려 가운데 도첩이 없는 자를 뽑아서 3개조로 나누어 부역하게 하고 부역을 마친 뒤에는 도첩을 지급하여 돌려보냈다. 또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완공한 뒤에는 승군(僧軍) 350명씩을 각각 배정하여 매년 여섯 번 즉 두 달씩 돌아가면서 번을 서게 하였다. 이들은 남한산성 내의 10개 사찰과 북한산성 내의 11개 사찰에 배치되었는데,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승려가 동원되었다.
한편 종이의 생산과 상납은 전란 이후 사찰과 승려가 담당한 가장 광범위한 부역이었다. 그 폐단 또한 극심하여, 유서 깊은 사찰이 쇠락하고 승려가 환속하거나 이탈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종이의 생산은 주로 삼남 지방의 사찰에서 담당하였는데, 생산한 종이는 대개 중앙 및 지방 관청에 납부하였다. 중앙의 경우 대전과 중궁전을 비롯해 성균관·교서관·예조·병조·군기시 등에 납부하였다. 지방의 경우에는 병영(兵營)과 공방 등에 납부하였으며, 축문지(祝文紙)의 용도로 서원에 납부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의 승려들은 그밖에도 시신을 매장하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 비상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도토리를 줍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벌목과 운송, 석재 운송 등에 징발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각 지방에서 의무적으로 상납해야 하는 토산품의 생산과 납부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중한 부역으로 인해 환속하는 승려가 속출하자, 영조와 정조대에는 승려의 부역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지방관의 상소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김갑주,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의 종합적 고찰」, 『불교학보』25,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88.
- 김순규, 「조선후기사찰 지역의 변화」, 『청람사학』3, 한국교원대학교 청람사학회, 2000.
- 여은경, 「조선후기 사원침탈과 승계」, 『경북사학』9, 경북대학교 사학과, 1986.
- 오경후, 「조선후기 승역의 유형과 폐단」, 『국사관논총』107, 국사편찬위원회, 2005.
- 윤용출, 「조선후기의 부역승군」, 『인문논총』26, 부산대학교, 1984.
- 이병희, 「조선시기 사원경제연구의 동향과 과제」, 『배종무총장퇴임기념사학논총』,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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