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敬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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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풍군부소산에 있던 절.

개설

경천사(敬天寺)는 고려 예종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말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이 경천사를 자신의 원당으로 만들고 석탑을 조성하였다. 경천사 석탑은 원나라 양식에 의거하여 만들었는데, 이 양식을 본받아 조선 세조대에 건립된 것이 현재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 석탑이다. 조선초까지 임금이 경천사에 왕래했던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중종대에 이미 퇴락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고려시대

경천사는 개풍군 광덕면부소산(扶蘇山)에 있던 사찰이다. 이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충분하여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고려사』 「세가」 1113년(고려 예종 8) 9월에 임금이 "장원정에서 경천사(慶天寺) 낙성식에 갔다."고 하였으므로 예종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의 기록과 더불어 『고려사』 1143년(고려 인종 21) 9월의 기록에는 사찰명의 한자를 ‘경천(敬天)’이라 하지 않고 ‘경천(慶天)’이라 하였는데, 그 이외의 기록은 모두 ‘경천(敬天)’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같은 사찰의 한자 음운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은 창건 이후 왕이 자주 행차하였던 것으로 볼 때 고려 왕실의 원당(願堂)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원나라 승상 탈탈이 원당으로 만들고, 진녕군(晉寧君)강융(姜融)이 원나라에서 장인(匠人)들을 뽑아서 석탑을 세웠다고 하였다. 아마도 고려말에 이르러 경천사는 탈탈의 원당이 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기단 위의 제1층 탑신 미간에 새겨져 있는 「시납기명(施納記銘)」에서 원나라 황제와 황후의 복덕을 기원하고 진녕군강융을 대시주자(大施主者)로 기록하고 있는데, 강융은 바로 탈탈의 장인이었다. 또 당시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딸이 순제의 태자를 낳아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원나라 장인들을 고려에 보내 탑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탑은 원나라 석탑 양식에 의거하여 1348년(고려 충목왕 4)에 13층의 대리석으로 만들었지만 기단이 3층이므로 오늘날 방식으로 셈하면 10층이 된다.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에 무단으로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다시 되찾아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2) 조선시대

조선초기에 경천사는 왕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었다. 태조는 경천사에서 숙식을 하기도 하고(『태조실록』 2년 10월 19일), 중국 황제 생일인 천추절(千秋節)을 기념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2년 11월 5일). 또 부모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불경을 강(講)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3년 4월 29일). 태종 역시 경천사 등지에서 사냥을 하였다(『태종실록』 18년 4월 12일). 그러나 이후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경천사와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중종대의 문신 채수(蔡壽)는 「유송도록(遊松都錄)」에서 절이 화재로 인해 겨우 방 한 칸만 남았는데 뜰 가운데 13층의 석탑이 있다고 회고하면서, 원나라 기황후(奇皇后)가 원당으로 삼고 시주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숙종 때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서는 경천사 북쪽 3~4리(약 1.5㎞) 즈음에 푸른빛의 괴석이 많다고 하였다. 마치 높고 험악한 봉우리들이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깊고 험한 계곡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고, 물이 든 그릇 속에 이 괴석을 두면 물을 빨아올려 봉우리 꼭대기까지 축축해져서 한낮 뙤약볕에도 마르지 않으며 이끼가 끼여 있어서 흡사 침수향(沈水香) 같기 때문에 침향석(沈香石)이라 불렀다고 한다.

참고문헌

  • 『속동문선(續東文選)』
  • 『산림경제(山林經濟)』
  • 고유섭, 『송도의 고적』, 悅話堂, 2007.
  • 정은우, 「경천사지10층석탑과 삼세불회고」, 『미술사연구』19, 미술사연구회,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