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발(衣鉢)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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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의발 |
한글표제 | 의발 |
한자표제 | 衣鉢 |
관련어 | 법맥(法脈), 법통(法統), 선맥(禪脈), 전등(傳燈), 가사(袈裟), 발우(鉢盂)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의발(衣鉢)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8년 8월 17일, 『세종실록』 23년 12월 9일, 『선조실록』 38년 7월 24일 |
선종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통을 전할 때 전수하는 상징적인 물품.
개설
의발(衣鉢)은 옷과 발우(鉢盂), 즉 승려의 옷과 공양 그릇을 말한다. 석가모니 재세 당시에 승려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던 의발은 중국 선종에 이르러 법통을 전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중국 선종에서는 석가모니가 마하가섭에게 의발을 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선종이 석가모니의 핵심 사상을 계승한 종파임을 자부하였으나, 의발 전수에 대한 이야기는 꾸며 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스승이 제자에게 의발을 전수하던 전통은 제6조 혜능(慧能) 이후에 끊어졌으나, 이후에도 의발이라는 용어는 ‘법통을 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계속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불교에서 의발은 승려가 소유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물건이었는데, 선종에 이르러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을 때 물려받는 물품을 상징하게 되었다. 인도의 불전(佛典) 기록에서는 의발이 인가의 물품으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러한 용례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의발은 ‘삼의일발(三衣一鉢)’의 약칭으로, 석가모니 재세 당시에 승려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을 의미하였다. 삼의일발은 상의(上衣)·중의(中衣)·하의(下衣)와 음식을 담는 그릇인 발우를 가리킨다. 석가모니는 세 벌의 옷과 밥그릇 하나를 가지고 탁발하며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오늘날에도 동남아시아의 승려들은 탁발하며 수행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의발이 소유물의 개념을 넘어 법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은 중국 선종의 발생과 관련이 깊다. 선종에서는 석가모니가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하면서 그 징표로 옷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종파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선종이 발생한 이후의 불전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발 가운데 옷을 전하였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밥그릇을 전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승려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수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준다는 의미로 의발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선종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할 때 꽃을 들어 보였는데, 아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마하가섭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마하가섭에게, "나의 법을 전하노니, 세상에 유포하여 단절하지 않도록 하라."고 이르며 상의를 벗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의발을 전한 최초의 장면이라고 한다. 하지만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는 석가모니가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만 미소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을 뿐 의발을 전수했다고 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선종에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석가모니의 의발을 물려받은 마하가섭의 법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28대에 걸쳐 이어졌다. 흔히 이들을 28조사(祖師)라고 하는데, 그 28번째 의발을 전해 받은 사람이 바로 달마(達磨)이다. 6세기에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는 선법(禪法)을 전하여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그의 법은 제2조인 혜가(慧可)에게 전해졌다. 그 뒤 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을 거쳐 혜능에게 이어졌는데, 제6조 혜능에 이르러 의발을 전하던 전통이 폐지되었다. 홍인이 혜능에게 이르기를, 달마가 인도에서 왔을 때는 사람들이 선(禪)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옷을 전하여 인가하였지만, 이제 신심이 두터워졌고 또 옷은 다툼의 실마리가 될 뿐이니 더 이상 전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의발을 전하던 관습은 사라지고,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일을 나타내는 ‘의발을 전한다’는 표현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발을 전한다는 말은 선종의 법통(法統)을 전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초에는 왕실에서 승려들에게 의발이나 가사를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408년(태종 8) 태상왕의 빈전(殯殿)에서 화엄삼매참법석(華嚴三昧懺法席)을 베풀었는데, 이때 태종은 자신의 사재를 들여 법회를 개최하고 법회에 초청된 108명의 승려들에게 각각 의발을 내려 주었고, 상왕(上王)정종은 각각 가사(袈裟)를 하사하였다(『태종실록』 8년 8월 17일). 이때 태종과 정종이 승려들에게 의발과 가사를 하사한 것은 이 용품들이 승려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품인 동시에 법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 또한 왕실에서 법회를 열고 승려들에게 의발을 하사했다(『세종실록』 23년 12월 9일). 불교계만이 아니라 일반에서도 의발을 전수받는 것을 수제자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선조실록』의 "정인홍이 조식에게 의발을 전수받은 자"라는 표현 등이 이를 말한다(『선조실록』 38년 7월 24일).
선종의 법통
중국 선종의 법통은 달마에서 비롯되어 제2조 혜가, 제3조 승찬, 제4조 도신을 거쳐 제5조 홍인에게 전해졌다. 그 뒤 홍인의 제자인 신수(神秀)와 혜능이 활동하던 시기에 선종은 크게 발전하였다. 신수는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여 북종선(北宗禪)의 조사가 되었고, 혜능은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여 남종선(南宗禪)의 초조가 되었다. 북종선은 점차 쇠퇴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지만, 남종선은 번성하여 당송(唐宋)대에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을 형성하였다. 오가칠종이란 임제종·조동종·위앙종·운문종·법안종 등의 5가(家)와, 임제종에서 갈라져 나온 황룡파·양기파 등의 2파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에서 선종이 번성하던 9세기경에 남종선이 전래되었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도의(道義)가 821년에 처음으로 남종선을 소개하였고, 그 뒤 홍척(洪陟)·혜철(惠哲)·무염(無染)·체징(體澄)·현욱(玄昱)·범일(梵日)·도윤(道允)·긍양(兢讓)·이엄(利嚴) 등이 중국에 유학하여 남종선의 선맥을 계승하였다. 이들에 의해 개창된 산문을 흔히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부른다. 구산선문은 고려시대 초기에 조계종(曹溪宗)이라는 독자적인 종파로 성장하여, 이미 성립되어 있던 화엄종·법상종 및 고려시대에 의천(義天)에 의해 창립된 천태종 등과 교세를 겨루었다. 조계종은 고려시대 중기에 지눌(知訥)의 수선결사(修禪結社)를 거치며 더욱 교세를 확장하였고, 고려시대 말기에는 보우(普愚)와 혜근(慧勤) 등에 의해 중국 임제종의 법맥이 전래되면서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가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 종파가 통폐합되었지만, 선종의 임제 법통은 면면이 이어져 왔다.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은 임제종 법통을 정통 법맥으로 인정한다.
참고문헌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51.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정성본, 『선의 역사와 사상』, 불교시대사,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