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장(僧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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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건축, 불상, 불화, 범종 등을 제작하는 승려 장인(匠人).

개설

승장(僧匠)은 불사(佛事)를 할 때 불당 건축, 불상 조성, 불화 제작 등의 소임을 맡아 진행하는 승려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장엄을 중시하는 사찰 조영에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였고 재주 있는 승려들이 불심(佛心)으로 정진하며 제작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 진행된 대대적인 중창 불사에 많은 수의 승장이 참여하면서 조각, 불화, 범종 등 분야별·지역별로 계보를 형성하며 불교 미술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

내용 및 특징

(1) 승장 관련 용어

조선시대에 불화, 조각, 범종 등의 불사에 참여한 승장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화(畵)’, ‘공(工)’, ‘장(匠)’ 등의 글자가 포함된 용어들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화원(畵圓), 화원(畵員), 화사(畵師), 화사(畵士), 화공(畵工) 등으로 많이 쓰였다.

불화와 조각에서 승장을 기록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용어는 화원이었다. 조선시대 화원이라는 용어는 불화승(佛畵僧)은 물론 조각승(彫刻僧), 종을 만드는 주종장(鑄鐘匠), 국가 기관인 도화서 소속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당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명칭이었다.

승장이라는 용어는 신분에 따른 직책을 기재할 때 사용되었다. 국가 공사를 위해 차출되어 일반 장인들과 함께 참여한 경우, 범종 제작시 승려 주종장과 일반 주종장을 구분하여 기재할 경우에 사용된 예가 있다.

(2) 불화승

불화승은 불화를 그리는 것 외에도 건물의 내·외벽을 장엄하는 단청, 불상들의 불상에 금칠을 입히는 개금(改金)과 불상에 채색을 다시 하거나 고치는 개채(改彩) 등에도 참여하였다. 불화승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미승 이상의 수행을 거친 승려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다. 불화 제작은 전 과정이 철저하게 분업되어 진행되었는데, 기획을 맡아하는 승려, 작업을 전체적으로 지위하는 우두머리 승려인 수화사(首畵師), 각각의 작업을 행하는 승려 등으로 구분되었다.

불화승을 지칭하는 명칭은 시대와 불화의 제작 경위 등에 따라 달리 쓰였는데 화원이라는 명칭은 전 시기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조선전기에는 양공(良工)·경화(敬畵), 17세기에는 화사(畵師), 18세기에는 용면(龍眠), 19세기에는 금어(金魚)·편수(片手) 등의 명칭이 통용되었다.

불화승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출가한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안에서 사승 관계를 통해 화맥(畵脈)을 이어나갔다. 각 지역에서 활동했던 불화승 중에 불화 화단을 주도한 승려로는 전라도의 도일(道鎰), 경상도의 신겸(信謙)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불화 양식을 주도하였으며 19세기 중·후반에는 전라도의 천여(天如)와 경상도응상(應祥), 경기도의 영환(永煥)이 이끌어갔다. 또 19세기 말에는 전라도의 묘영(竗英), 경상도의 진철(震徹), 경기도의 창엽(昌燁) 등이 화맥을 형성하며 불화계를 주도하였다. 충청도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경기도와 경상도의 불화승들이 불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3) 조각승

조각승은 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를 진행하는 승려로 조각의 밑그림 제작, 조각, 마무리 작업 등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불상은 대부분은 목조상이라 불상복장에서 나온 불상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의 목록을 살펴보면, 조각승을 목수를 뜻하는 ‘재(梓)’자를 사용하여 재장질(梓匠秩)이라고 하거나 조각을 의미하는 조성화원질(造成畵員秩) 등의 명칭을 써서 기록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당시 승려들이 구국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17세기경에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이 제고되었다. 이 분위기를 틈타 전국 사찰에서는 많은 수의 불상을 제작하였는데, 이때 조각승 유파가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표적인 조각승 유파로는 경상북도 남부 지역을 근거지로 경상, 전라, 충청도에서 활동한 현진(玄眞)·청헌(淸憲)파, 전라도에서 활동한 응원(應元)·인균(印均)파, 전라북도를 근거지로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에서 활동한 수연(守衍)파,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법령(法令)파, 전라도에서 활동한 무염(無染)파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가장 중요한 유파로는 단응(端應)·탁밀(卓密)파, 승호(勝浩)파, 색난(色難)파, 진열(進悅)파 등을 들 수 있다.

불상은 대부분 하나의 유파가 단독으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많은 불상을 한꺼번에 조성하는 경우에는 여러 유파가 함께 작업을 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 지장암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후가 당시 유명한 유파의 조각승들을 모아 공동으로 만든 불상이다. 원래 자수원와 인수원에 봉안할 목적으로 만든 11존상 가운데 하나로 이례적으로 현진, 응원, 수연 등이 참여하였다.

(4) 주종장

주종장(鑄鍾匠)은 사찰에서 사용하는 의식법구(儀式法器)인 범종(梵鍾), 금고(金鼓) 등을 제작하였다. 전란 후 17세기에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승려들의 거주 공간인 전각(殿閣)과 예배의 대상인 불상, 불화 등을 우선적으로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의식 법기였던 범종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활동한 주종장의 수는 약 187명이며, 이 가운데 수장(首匠)으로 범종 제작을 주도한 인물은 약 48명이다. 조선후기 주종장은 신분에 따라 범종에 기재하는 직책의 용어를 ‘화(畵)·도(圖)’와 ‘주(鑄)’로 구분하였다. 승장은 주로 ‘화(畵)·도(圖)’로 기재하는데, 이는 승장이 주로 도안(圖案)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일반 장인들은 ‘주(鑄)’로 기재했는데, 이들의 역할이 종의 주조(鑄造)에 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승려 주종장들은 17세기 전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만 활동하였다. 이후 범종을 제작하지 않고 제작된 범종을 사고파는 방식이 유행하면서 범종 제작이 줄어들자 일반 장인들이 범종 제작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18세기 대표적인 승장은 벽암문도(碧巖門徒)에 소속된 주종장으로, 이들의 계보는 범종의 형태를 기준하여 2개의 유파로 구분된다. 죽창(竹淐), 정우(淨祐)에서 태행(太行) 그리고 해철(海哲), 초하(楚荷)로 이어지는 계보와 응원(元應)에서 사인(思印)으로 그리고 극련(剋連), 조신(祖信)에게 계승되어 계일(戒日), 여석(餘釋)로 이어지는 계보다.

참고문헌

  • 송은석, 『조선후기 불교조각사』, 사회평론, 2012.
  • 안귀숙·최선일, 『조선후기승장 인명사전-불교조소』, 양사재, 2007.
  • 장희정, 『조선후기 불화와 화사연구』, 일지사, 2003.
  • 최선일, 『조선후기 조각승과 불상 연구』, 경인문화사, 2011.
  • 김수현, 「조선후기 범종과 주종장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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