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禪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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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승려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또는 임진왜란 당시에 공을 세운 승려들에게 내려 준 승려 자격증.

개설

조선시대에 선과(禪科)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먼저 명종대에는 승과(僧科)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다. 그 뒤 선조 연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승군 가운데 공을 세운 승려들에게 내려 준, 공식적으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 주는 일종의 자격증을 선과라 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도첩(度牒)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변천

승과로서의 선과는 조선시대에는 선시(選試)라고도 불렸다. 우리나라에서 승과는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승려가 되려는 후보자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시행한 인증 시험이 아니라 이미 출가한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선과의 시작은 고려 광종대로 추정되는데, 관원을 선발하기 위해 과거를 실시하면서 승과도 함께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승과는 관료제와 승정(僧政)이라는 이원적인 제도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려 한 고려 왕조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에게는 과거 급제자에게 관계(官階)관직(官職)을 수여하듯이 승계(僧階)와 그에 따른 승직(僧職)을 내려 주었다. 불교 교단의 상층부는 승과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국가에서 공인한 사찰의 주지 역시 승과 출신자들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승과는 국가의 불교 교단 통제와 관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승과를 주로 선시(選試)라 불렀다. 『경국대전(經國大典)』「도승(度僧)」조에 관련 규정이 수록됨에 따라, 「도승」조가 삭제되는 중종대 이전까지는 국가의 공식적인 시험으로 시행되었다. 『경국대전』의 이 조항은 조선시대 전기에 불교 교단과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였고, 연산군 대에 폐지된 승과가 명종대에 양종 체제의 복원과 함께 다시 시행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근거였다.

명종 연간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이루어진 양종의 복립과 선과의 재개는 관료들과 성균관 생원 등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으나, 전례(前例)대로 예조의 관리 하에 시행되었다(『명종실록』 9년 8월 18일).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에 선교양종 체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선과는 다시 혁파되었다(『명종실록』 21년 4월 20일). 원래 승과는 도첩을 받은 정식 승려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합격자에게 승직을 내려 주는 제도였다. 고위 승려를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교단을 관리하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명종대에 실시된 선과는 합격자에게 승직을 제수하는 것과는 별개로, 승려의 자질과 수를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대부분의 응시자에게 승려 자격을 허락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선조대의 선과는 이전과 제정 경위와 목적이 달랐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명을 받은 휴정(休靜)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의승군(義僧軍)을 모집해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성을 수축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승군의 공로를 치하하고, 또 의승군에 참여하거나 전공을 세울 동기 유발을 위해 1593년(선조 26)부터 선과첩을 내려 주었다. 원래 과거에 급제한 승려에게 주는 선과가 도첩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승려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그 반대급부로 출가자로서의 신분을 인정하는 방법은 조선후기 불교 시책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내용과 특징

승과로서의 선과는 『경국대전』 「도승」조에 그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선종과 교종에서 3년에 한번씩 실시하여 각각 30명씩 총 60명을 선발하였다. 선종에서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華嚴經)』과 『십지론(十地論)』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이러한 규정은 고려시대의 승과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의 시행 양상이 법규로 정착된 것이다.

선시 즉 승과는 국가로부터 출가를 인정받은 승려만 응시할 수 있었으므로, 선시를 앞두고 승록사(僧錄司)에서 도첩의 추가 발급을 예조에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선시와 관련된 여러 업무를 승록사에서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승록사가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됨에 따라 과거(科擧)와 마찬가지로 선시 또한 예조에서 관리하였다.

선시는 종파별로 시행하였는데, 예조의 관리가 파견되어 시험을 감독하였다. 또 문과(文科)향시(鄕試)와 같이 각 도에서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승려를 선발해 승록사에 보고하면 그 가운데 1/3 정도를 최종적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선시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의 승계를 받았고 승진하여 중덕(中德)이 되었다. 중덕이 되면 판사(判事)의 서경과 대간(臺諫)고신(告身)을 거쳐 주지(住持)가 될 수 있었다(『성종실록』 9년 8월 4일).

선과가 재개된 1552년(명종 7)에는 예조 정랑양응태(梁應鮐)와 이언경(李彦憬)을 각각 선종과 교종의 본산(本山)인 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로 보내 선시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때 선종에서는 21명, 교종에서는 12명을 최종 선발하였다(『명종실록』 7년 4월 12일). 명종 연간의 선시는 폐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식년시로 치러졌고, 예조에서 담당하였다(『명종실록』 9년 8월 13일). 또 전례대로 초시(初試)를 통해 우선 선종과 교종에서 각각 100명씩을 선발한 뒤, 다시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최종 선발하였다(『명종실록』 9년 8월 18일). 선시의 시험 감독 및 선발 과정에는 예조의 관원과 선교양종의 판사, 그리고 승과에 급제한 승려도 참여하였다. 그런데 연산군대에 양종이 혁파되고 중종대에 『경국대전』에서 「도승」조가 삭제된 뒤로는 도첩을 발급하지 않았으므로, 선과를 다시 시행할 때 무도첩승의 응시가 문제가 되었다(『명종실록』 7년 4월 20일). 이러한 상황에서 선과는 도첩을 내려 주는 방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66년(명종 21)에 선과가 혁파된 뒤 선조대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다시 선과가 등장하였으나, 이때는 시험이 아니라 도첩과 같은 일종의 자격증으로 사용되었다. 의승군이 전쟁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는 등 여러 활약을 하면서 승군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생긴 조정에서는 적의 목을 벤 승군에게 선과를 내려 주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6년 6월 29일). 특히 당시 승군을 이끌고 있던 도총섭(都摠攝)휴정과 총섭(摠攝)유정(惟政), 의엄(義嚴) 등에게 선과를 나누어 주게 하여 승군을 모집하고 통솔하기 수월하게 하였으며(『선조실록』 26년 7월 19일) [ 『선조실록』 29년 12월 5일 3번째기사], 선과의 발급을 통해 군량을 모으려 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12월 8일). 그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인력이 부족해 한양과 지방에 쌓여 있는 시체를 처리하기 어렵게 되자, 역시 승려들을 모집하여 시체와 유골을 잘 묻어 준 경우 선과를 주는 것으로 포상하려 하였다(『선조실록』 26년 10월 2일). 이러한 선과는 도첩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승려의 자격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증이 되어 도첩을 대신하였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이장희, 「임진왜란 중 의승군의 활동에 대하여」, 『사명당 유정』, 지식산업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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