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選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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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도첩을 받은 정식 승려를 대상으로 시행한 시험.

개설

선시(選試)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시행된 승려 대상 시험으로 승과(僧科)라 부르기도 한다. 도첩(度牒)을 가진, 즉 출가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승려만 응시할 수 있었다. 조선초에는 식년시로 설행되었으며,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3년에 한번씩 정해진 시험 과목으로 시험을 치르고, 선·교 각 30명씩 합격한 승려에게는 대선(大選)의 승계를 주었다. 연산군대에 혁파되었다가 명종초에 잠시 복설되었으나 문정왕후가 죽기 직후에 또다시 폐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승려를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하는 제도는 이미 중국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불교 경전에 대한 시험을 치른 뒤, 합격자에게만 도첩을 발급하고 승적(僧籍)을 작성해 주는 시경도승(試經度僧) 제도를 시행하였다. 도첩 발급의 전제 조건으로 시험을 치르도록 한 것은 사도승(私度僧)을 단속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거기에 더하여 승려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을 심사함으로써 승려의 질을 관리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에 비해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실시된 승과 즉 선시는 승려가 되려는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시행한 인증 시험이 아니라 이미 출가한 승려들 가운데서 고위 승려를 선발하기 위해 시행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려 광종대에 관원을 선발하기 위해 과거를 실시하면서 승과도 함께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시대의 승과는 국가를 관료 제도와 승정(僧政) 제도로 이원화시켜 운영한 고려 왕조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에게는 과거 급제자에게 관계(官階)관직(官職)을 수여하듯이 승계(僧階)와 그에 따른 승직(僧職)을 내려 주었다. 승과에 합격하면 대덕(大德)의 승계를 받았는데, 점차 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로 승차하였다. 그 뒤 선종의 경우에는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로, 교종은 수좌(首座)-승통(僧統)으로 승진하였다. 불교 교단의 상층부는 승과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국가에서 공인한 사찰의 주지 역시 승과 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 그 결과 승과는 국가의 불교 교단 통제와 관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제도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승과를 주로 선시라 불렀다. 『경국대전(經國大典)』「도승(度僧)」 조에 관련 규정이 수록됨에 따라 「도승」조가 삭제되는 중종대 이전까지는 국가의 공식적인 시험으로 시행되었다. 『경국대전』의 이 조항은 조선시대 전기에 불교 교단과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였다.

그 뒤 연산군대에 폐지되었던 선시는 명종 즉위 후에 선교양종이 복설되면서 다시 시행되었다. 명종대의 이러한 조처는 『경국대전』의 이전 조항에 의거한 것이었으며, 승려의 증가와 그에 따른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에 따른 것이었다(『명종실록』 5년 12월 15일). 원래 승과는 도첩을 받은 정식 승려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합격자에게 승직을 내려 주는 제도였다. 고위 승려를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교단을 관리하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명종대에 실시된 선과는 합격자에게 승직을 제수하는 것과는 별개로, 승려의 자질과 수를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대부분의 응시자에게 승려 자격을 허락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내용

조선시대의 선시는 『경국대전』 「도승」조에 그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선종과 교종에서 3년에 한 번씩 실시하여 각각 30명씩 총 60명을 선발하였다. 선종에서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華嚴經)』과 『십지론(十地論)』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이러한 규정은 고려시대의 승과 전통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시행 양상이 법규로 정착된 것이다.

선시 즉 승과는 국가로부터 출가를 인정받은 승려만 응시할 수 있었으므로, 선시를 앞두고 승록사(僧錄司)에서 도첩의 추가 발급을 예조에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태종실록』 8년 5월 10일). 조선시대 초기에는 선시와 관련된 여러 업무를 승록사에서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승록사가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됨에 따라(『태종실록』 5년 3월 1일), 과거(科擧)와 마찬가지로 선시 또한 예조에서 관리하였다. 선시는 종파별로 시행하였는데, 예조의 관리가 파견되어 시험을 감독하였다(『성종실록』 22년 12월 8일). 또 문과(文科)향시(鄕試)와 같이, 각 도에서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승려를 선발해 승록사에 보고하면 그 가운데 1/3 정도를 최종적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선시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의 승계를 받았는데, 승진하면 중덕(中德)이 되었다. 중덕은 판사(判事)의 서경과 대간(臺諫)고신(告身)을 거쳐 주지(住持)가 될 수 있었다(『성종실록』 9년 8월 4일).

선시가 재개된 1552년(명종 7)에는 예조 정랑양응태(梁應鮐)와 이언경(李彦憬)을 각각 선종과 교종의 본산(本山)인 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로 보내 선시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때 선종에서는 21명, 교종에서는 12명을 선발하였다(『명종실록』 7년 4월 12일). 명종 연간에는 선시의 시험 감독 및 선발 과정에 예조의 관원과 선교양종의 판사, 그리고 승과에 급제한 승려 등이 참여하였다.

변천

고려 광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승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식년시로 설행되었으며, 『경국대전』에 관련 규정이 수록됨으로써 법제화되었다. 그 뒤 연산군 대에 혁파되었고(『중종실록』 4년 7월 3일), 중종대에는 『경국대전』에서 「도승」조가 아예 삭제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명종 연간인 1552년부터 다시 식년시로 실시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선과(禪科)로 불린 경우가 많았다. 『경국대전』에는 선교 각 30명씩 60명을 선발하도록 하였으나, 이때는 선종 21명, 교종 12명 총 33명을 선발하였다. 불교를 옹호하던 문정왕후가 1565년(명종 2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에 양종이 혁파되면서 선시도 다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下
  •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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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문경, 「고려말·조선초 불교기관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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