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官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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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과 지방의 정치를 담당한 관서에 편제된 벼슬.

개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고려시대 말의 관제를 계승하여, 중앙과 지방에 문반직(文班職)으로 정1품 이하 900여 개의 정직(正職)과 100여 개 이상의 겸직(兼職) 및 40여 개의 유외직(流外職)을, 무반직(武班職)으로 4,400여 개의 정직 및 겸직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된 1485년(성종 16)까지, 재정 절감, 관제 및 신분제의 정비, 국경 방어 등과 관련하여 유외직이 혁파되고 문반직에 포괄되었던 잡류(雜類)가 잡직(雜職)으로 정비되었으며, 예우직(禮遇職)·여관직(女官職)·토관직(土官職)이 설치되었다. 그 결과 모든 관직(官職)이 크게 중앙과 지방 즉 경외(京外)의 문반직·무반직·잡직과 토관직·여관직 등으로 정립되어,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따라 관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할 때까지 계승되었다.

여러 종류의 관직 가운데 중심이 된 것은 경외의 문반직과 무반직이었다. 문반직에는 조선시대 전기에는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영돈녕부사 이하 510여 직 이상의 경직(京職)과, 종2품 관찰사·부윤 이하 810여 외직(外職)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비변사·유수부·규장각 등이 신설됨에 따라 각급 관직이 설치되었고, 선왕·선후의 능(陵)을 관리하는 능관(陵官)이 크게 늘어난 데 비해, 중앙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등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수(敎授)·훈도(訓導)는 감원되었다. 그 결과 『속대전(續大典)』이 간행된 1746년(영조 22)에는 1,000여 개의 관직으로 조정되었다가, 이후 소폭으로 변동되면서 조선시대 말까지 계승되었다.

무반직의 경우 조선전기에는 중앙에 정1품 영중추부사 이하 830여 정직 및 4600여 체아직이, 지방에는 종2품 병마절도사 이하 110여 정직 및 400여 체아직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선혜청·오군영 등이 신설되고 변진(邊鎭)이 증설됨에 따라 그에 필요한 각급 관직이 설치되었으며, 오위(五衛)의 체아직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중앙의 1,120여 정직과 1,550여 체아직 및 지방의 110여 정직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위로는 왕을 받들고 아래로는 의정부·비변사·육조(六曹)·도(道) 등과 그에 속한 당상관 이하의 지휘를 받으면서 부여된 업무를 수행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국경을 방어하는 자리였다. 특히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三司)는 언론을 관장하고, 간쟁과 서경(署經), 규찰 등을 통해 통치 기강을 확립하고 선정을 보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산계(散階)를 바탕으로 제수되었다. 문반직은 문산계(文散階), 무반직 및 군사(軍事)는 무산계(武散階), 잡직은 잡직계(雜職階), 토관직은 토관계(土官階)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종친직과 의빈직은 문반직에 포괄되기는 하나 각각 종친계(宗親階) 및 의빈계(儀賓階)를 토대로 제수되었다.

한편 각 관직의 지위는 문반직이 가장 우월하고, 그 다음이 무반직이었으며, 잡직이 가장 열등하였다. 그에 따라 문반직과 무반직은 차별 없이 교차되어 제수되었지만, 잡직 및 토관직에 있는 관원이 문·무반직에 제수될 때는 1품계가 강등되었다. 문반직 중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정치를 주도한 의정부·육조·삼사 등에 속한 관직이었다. 특히 당하관(堂下官) 이하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제수되었는데, 대부분 승자·승직되면서 체직되었다. 또한 단기간에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국정 운영을 주도하는 종2품 이상으로 무난히 승진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리면서 모든 관원이 선망하는 관직이 되었다. 또 경직이 외직보다, 경직 내에서는 직계아문(直啓衙門)의 관직이 육조속아문(六曹屬衙門)의 관직보다, 육조속아문의 관직은 관각직(館閣職)이 여타 관직보다 각각 우월한 지위를 누렸으며, 외관의 경우 수령(守令)이 그 외의 다른 관직보다 우월하였다.

내용 및 특징

문반직은 크게 그 근무지에 따라 경직과 외직으로 구분되고, 경직은 다시 직질에 따라 당상관(堂上官)·당하관·참상관(參上官)·참하관(參下官)으로 나뉘었다. 또 상근 여부에 따라 정직과 겸직으로 나뉘었으며, 녹봉 지급 여부에 따라 녹직(祿職)과 무록직(無祿職), 소속 관서의 지위에 따라 직계아문과 육조속아문, 직사(職事) 여부에 따라 정무직(政務職)·시종직(侍從職)·군사직(軍事職)·예우직(禮遇職) 등으로 구분되었다. 외직은 목민 여부 등에 따라 관찰사인 방백(方伯)·부윤을 비롯한 수령과 그 외의 관직으로 구분되었다.

문반에는 문과·음서·천거를 거쳐 출사한 인물과, 혈연을 바탕으로 제수된 종친·부마, 외척과 그 자손,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봉군된 공신 등이 포괄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관계(官階)를 바탕으로 제수되었는데, 문반직의 경우 문반과 외척은 문산계를 토대로, 종친과 부마는 각각 종친계와 의빈계를 토대로 제수되었다. 잡직은 잡직계, 토관직은 토관계를 바탕으로 하였다. 문반과 외척의 자손은 모든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이들 관직에는 정원이 있었다. 여기에 비해 의빈 등이 제수되는 관직에는 정원이 없었으며, 의빈은 종3품직, 종친은 정6품직, 공신은 종2품직이 하한(下限)이었다.

문반은 고과(考課)·포폄법(褒貶法)에 따라, 정기 인사인 도목정(都目政)과 임시 인사인 전동정(轉動政)을 비롯한 문과·공로·특지 등을 통해 승직·강직·파직되었다. 당상관의 경우 정해진 임기 없이 당상관의 승진 순서인 좌목(座目)과 왕의 특별 명령인 특지(特旨)에 의해 승진하였다. 당하관 이하 경관의 경우 참상관 이상은 900일의 근무 기간을 채우고 근무 평가가 5고(考) 3상(上)인 사람이, 참하관은 450일의 임기를 채우고 3고 2상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 가자(加資)되면서 체직되었다. 체직 때에 의정부·육조 낭관은 승직되었고 그 외의 관원은 같은 품계의 관직으로 체직[平遷]되었고, 10고 2중인 경우에는 무록관으로 체직되었으며, 10고 3중 또는 5고 2중, 당상 수령의 경우 5고 1중인 관원은 파직되었다. 외관은 경관과 마찬가지로 가자되었으나 임기는 달랐는데, 관찰사와 도사의 경우 360일, 수령의 경우 1,800일이었다. 다만 당상 수령이나 가족 없이 부임한 수령은 임기가 900일이었다.

문반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무반을 압도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정책을 입안하고 군사·국방을 제외한 모든 행정을 결정·집행하였다. 중앙의 정1품~정3품 당상관은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된 의정부와 육조 등 직계아문의 장관이나 차관으로서, 낭관을 지휘하고 해당 관서의 정무 전반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렸다. 또한 왕이 임석하는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소속 관서의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것은 물론, 각종 현안이나 조정 대소사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등 국정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3품 당하관 이하는 의정부와 육조 등에 속한 낭관의 경우 실무를 관장하여 해당 관서의 운영을 뒷받침하였고, 육조속아문인 여러 시(寺·)감(監)·관(觀)·창(倉)·고(庫)·서(署)의 관원은 그 관서의 장관과 속관으로서 각각 정사를 주관하고 담당하였다. 예우 기관인 종친부·의빈부·돈녕부에 속한 관직은 담당하는 직무가 없었다. 한편 삼사(三司)로 통칭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원은 언론 활동을 통하여 왕에게 간쟁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당하관 이하의 관직을 제수할 때 그 자격을 심사하는 등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선정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의정부와 육조의 낭관 및 언론을 관장한 삼사의 관원은 재주와 식견이 뛰어난 인재 중에서 선발하였고, 대개 단기간에 당상관 이상으로 진출하였기에 청요직으로 불리면서 모든 관원이 선망하는 관직이 되었다. 또 당상관은 숭문경무(崇文輕武) 사상 및 문반 중심의 군정 운영에 따라 오위도총부·오위 등의 군직을 겸대하며 군정을 지휘하였다. 외직의 경우 관찰사를 비롯한 수령 등이 지방행정을 총관하고 백성을 다스렸다. 관찰사는 왕의 위임을 받아 도내의 수령을 지휘·감독하면서 도정을 총괄하였을 뿐 아니라,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대하면서 군정을 총관하였다. 수령은 관내의 행정을 총관하고 절제사 이하의 군직을 겸대하면서 군정을 수행하였다.

무반은 문반과 더불어 양반으로 불렸으며, 법제적으로 문반과 병립하면서 군사를 지휘하여 경외의 치안을 유지하고 국경을 방어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정부와 육조 등 문반아문과 그에 속한 문반 정1품~정3품 당상관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었을 뿐 아니라, 무반의 당상관인 영중추부사 등의 정직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직임이 없는 예우직이었다. 또 군령권을 관장한 오위도총부의 정2품 도총관(都摠管)과 종2품 부총관을 비롯하여 겸사복장·내금위장·오위장 등은 겸직이었는데, 대부분 문반이 겸임하였다. 외방의 육군과 수군을 총관하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는 관찰사의 지휘를 받아야 했으며, 소수의 첨절제사 및 만호를 제외한 절제사 이하의 군직 대부분 역시 문반 수령이 겸임하는 관직이었다. 군직의 대다수가 소속된 오위의 경우 병조의 속아문이었으므로 인사 등에서 병조의 통제를 받았는데, 그나마 오위 군직의 대부분은 1년 내내 근무하면서 4번 녹봉을 받고 문반과 같이 고과·포폄법에 따라 가자되는 정직과 달리 근무 기간에만 녹봉을 받고 근무 일수에 따라 가자되는 체아직이었다. 체아직 제도는 국가가 적은 비용으로 군사력을 유지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였지만, 이를 통하여 많은 군사가 무반직과 연계되어 무산계를 획득함으로써 중하층 무반 및 군사들의 관직 획득·신분 상승 욕구를 충족시켜 군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듯 무반은 문반과 대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문반직에 종속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잡직은 동반아문인 장악원·액정서·공조·교서관 등 10여 개의 관서와 오위에 속한 파진군·대졸·팽배에 소속되어 각종 잡역과 군사에 종사하는 자리였다. 동반에는 정6품 장악원 전악과 액정서 사알 이하 141직이 있었고, 서반에는 종7품 파진군 근사 이하 1,447직이 있었다. 문·무반 모두 정6품이 상한(上限)이었고, 잡직에 있는 관원이 문·무산계를 받을 때는 천인(賤人)인 출신으로 인해 1품계를 내려서 받았다. 토관직은 평안도·함경도의 요충지인 평양부 등 12개의 부윤부·대도호부·목·도호부관에 설치되어 소속 관서의 행정 및 군사를 담당하였는데, 정5품 도무사 도무 이하 209직의 문반과 정5품 진북위 여직 이하 238직의 무반이 있었다. 여관직에는 왕에게 속한 정1품 빈(嬪) 이하 35직의 여관(女官)·궁관(宮官)과, 왕세자에게 속한 종2품 양제(良娣) 이하 13직의 여관·궁관이 있었다.

문반직·무반직·잡직과 토관직의 지위는 주로 관원의 신분, 관서의 기능 및 업무, 인사 규정 등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결과 문반직이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렸고, 무반직이 그다음이었으며, 잡직은 문·무반과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문반직 중에서는 경직이 외직보다 우대되고 우월하였다. 경직 중에서는 직계아문의 관직이 육조속아문의 관직보다 우월하였고, 직계아문의 관직 중에서는 의정부·육조·비변사의 관직이 가장 우월하였고, 삼사의 관직이 다음이었다. 육조속아문의 관직 중에서는 성균관 등의 관각직(館閣職)이 그 외의 관직보다 지위가 높았다. 특히 조선후기의 이조 정랑 및 좌랑은 전랑(銓郞)이라 불리면서, 후임을 천거하고[自代制] 삼사의 당하관 이하 관원의 인사를 주관하였으며[通淸權],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삼사의 관원을 지휘하면서 의정부·육조 등의 당상관을 제약하는 등 큰 정치력을 발휘하게 됨에 따라 당쟁을 촉발·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문반직이 무반직보다 우월하였다. 문반직과 무반직 모두 감영·병영 요속(僚屬)이 우월하였고, 수령 등이 그다음, 교관·역관 등이 또 그다음이었으며, 마지막이 토관직이었다. 그 외의 당상·당하·참상·참하관, 정품·종품직, 정·겸직, 실·허직, 녹직·무록직, 정직·체아직, 정무·군사·예우직 등은 모두 지위의 고하나 대우의 차이에서 연유된 만큼 그 차이가 현격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경외의 문반직과 무반직, 잡직을 통틀어 6,000~7,000여 직의 정직·체아직과 110~600여 직의 겸직이 운영되었고, 조선후기에는 4,000~5,000여 직의 정직·체아직과 600~700여 직의 겸직이 운영되었다. 그중 중심이 된 것은 20여 개 직계·문한아문의 100여 당상관과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90여 당하·참상관이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관직은 1392년(태조 1) 개국과 동시에 고려말의 관제를 계승하여 중앙에 문하부 좌·우시중과 10위 상장군 이하 문·무 5,000여 정직과 도평의사사 판사·의흥친군위 절제사 이하 문·무 110여 겸직을, 지방에 도관찰출척사·병마도절제사 이하 문·무 800여 정직 및 수백여 토관직, 30여 경관 유외직(流外職)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이 간행되는 1485년(성종 16)까지, 정치제도의 정비, 종친·공신·부마의 예우, 관원의 포폄, 신분제, 재정 절감 등과 관련되어 유외직이 혁파되고, 문반직에 포함되어 있던 잡류가 잡직으로 정비되면서 제외되었다. 또 종친·부마·공신·외척과 소임이 없는 문·무 당상관을 예우하기 위한 관직이 설치되어 문반직과 무반직에 포괄되었으며, 여관직도 설치되었다. 동시에 경·외직과 문·무직이 직질에 따라 당상·당하·참상·참하직, 국정 운영 체계와 관련하여 직계아문·육조속아문직, 상근 여부에 따라 정직·겸직과 정직·체아직, 직사(職司) 여부에 따라 실직·허직, 녹봉 유무에 따라 녹직·무록직, 상치 여부에 따라 상설·임시직 등으로 정립되었다.

개국 초에 설치되었던 도평의사사 녹사 등 30여 유외직은 1466년(세조 12)까지 정9품·종9품직으로 개편되거나 혁파되었고, 이로써 유내직과 유외직으로 이원화되었던 관직 체계가 일원화되었다. 잡류는 1429년(세종 11)까지는 문반에 포괄되었고 문·무반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다음 해에 “사옹·사막·상의원·상림원·악공·도화원 소속 관원은 유품(流品) 즉 조관이 아니므로 조반(朝班)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서반 잡직을 따로 설정하고(『세종실록』 12년 9월 7일), 공상천예(工商賤隸)로서 수직(守職)하는 자를 그에 속하게 함으로써 조반과 구별하였다. 처음에는 잡직계가 설치되지 않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1444년(세종 26)에 서반 잡직계가 설정되면서 실현되었다. 이어 세조대에 동반 잡직계를 설정하고, 동시에 서반 잡직을 보완하고 동반 잡직을 설정하면서 정립되었다. 종친·부마·공신·외척과 소임이 없는 문·무 당상관을 예우하기 위한 관직은 1414년(태종 14)에 왕·세자의 처족을 위한 돈녕부, 1430년에 무임소 문·무 당상관을 위한 중추원, 1432년에 종친·부마를 위한 종친부·부마부, 1434년에 공신을 위한 충훈사를 각각 설치하고, 정1품 영돈령부사 이하를 두면서 비롯되었다. 중추원은 1466년(세조 12)에 중추부로 개칭되고 정1품아문으로 승격하였고, 충훈사는 1454(단종 2)에 충훈부로 개칭되고 정1품아문으로 승격하였다. 아울러 무반직에 정9품·종9품계를 설치함에 따라 정9품·종9품직이 설치되고, 오위 정직 중 소수의 정품직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품직이 체아직으로 전환되었으며, 중추원의 관직이 상참시의 동·서반 균형과 관련되어 무반 소속이 됨에 따라 조선시대 관직제의 중심이 된 문반·무반직이 정립되었다. 여관제는 1397년(태조 6)에 왕의 시침(侍寢)과 왕비·세자·세자빈 등의 지대(支待)를 위해 여관·내관·궁관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1435년(세종 17)경까지 세자를 위한 별도의 여관이 설치되고 여관이 내명부(內命婦)로 개칭되면서 정착되었으며, 1485년까지 내관·궁관의 직명·직품·직수가 개정되면서 정립되었다. 한편 조선의 개국과 함께 평양부·화령부·제주도관에 설치된 토관직은 1485년(성종 16)까지 두만강·압록강 변의 개척·방어, 외관제의 정비에 따라 제주는 혁파되고 새로이 함흥·의주 10관 및 경주 등 4관에 설치되었다가 혁파되면서 정립되었다.

한편 여러 종류의 관직 가운데 중심이 된 것은 경외의 문반·무반 정직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의 관직에는 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영돈녕부사 이하 510여 문반직과 영중추부사 이하 5,400여 무반 정직·체아직이 있었다. 지방에는 종2품 팔도관찰사 이하 810여 문반직과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이하 110여 무반직으로 정비되어 법제화되었다. 이후에는 다시 정치체제 재정비, 변란 극복, 수도와 변경의 방어, 재정 개혁, 왕실 의전 강화 등과 관련되어 비변사·오군영·유수부·선혜청·규장각의 설치, 일부 육조속아문의 강격·혁파, 오위에 속한 군직의 대대적인 삭감과 외교관의 혁파, 변진(邊鎭)의 증설에 따른 첨절제사·동첨절제사·만호관의 증치, 영·직장·참봉 등 능관의 증설 등으로 인해 관직이 조정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문·무 560여·2670여 경직과 440여·110여 외직으로 변경되었고,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580여·2680여 경직과 450여·210여 외직으로 개변되면서 운영되었다. 그 뒤 다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간행된 1865년(고종 2)까지 570여·2600여 경직과 450여·220여 외직으로 조정된 뒤 큰 변동 없이 조선시대 말까지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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