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총관(都摠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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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소속으로 왕의 호위와 궁궐의 숙위(宿衛)를 책임지던 직책.

개설

도총관(都摠管)은 조선전기 중앙군 오위(五衛)의 담당 부서인 오위도총부에 소속되어 왕과 궁궐의 시위(侍衛)를 책임지던 직책이다.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편하면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를 오위도총부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 도진무(都鎭撫)를 도총관으로 하고, 오위 겸부장(兼部長)을 종6품의 녹관(祿官)으로 만들었다. 이후 고종대까지 도총관이 유지되었다. 고종대 법전인 『대전회통』에 의하면 오위도총부는 도총관 5명, 부총관 5명, 경력(經歷) 6명, 도사(都事) 6명, 서리(書吏) 13명, 사령(使令) 2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도총관 5명과 부총관 5명은 다른 관서 관리가 겸임하되 1년간 맡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도총관은 임시로 왕과 궁궐의 시위를 책임지던 직책이었으며 수시로 담당자가 바뀌는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담당 직무

도총관은 왕과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던 직책으로 해당 장병들을 지휘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예종이 도총부(都摠府)에 내린 전지(傳旨)를 보면, 숙직하면서 궁궐을 지키는[宿衛] 장졸(將卒)은 숙직 중에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장졸 중에서 사사로운 일로 다른 곳에 왕래하는 경우 사졸(士卒)이면 참형(斬刑)에 처하고, 장수(將帥)는 능지처사(凌遲處死)시킨다고 하였다. 또한 사졸이 멋대로 가는데 장수가 금하지 못하면 장수를 파면하여 임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총부에서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과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 시기에 궁궐 문을 닫고 출입을 통제하는 임무도 담당하였다. 또한 성종대에는 궁궐 안에서,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던 투혜(套鞋)를 신은 사람과 우산을 가진 사람을 금지시키는 일도 맡았다. 광해군대인 1614년(광해군 6)에는 궁궐 내의 화재를 진압하고 현장을 경계하기도 했다.

도총관은 소속이 도총부이기는 했지만 병조(兵曹)와 세력 다툼을 보이기도 했다. 1736년(영조 12) 도총부 총관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다 병조 소속의 근장군(近仗軍)에게 저지당했다. 그러자 도총부 총관은 근장군을 체포하였는데, 영조는 병조와 도총부는 균등한 숙위 관사라면서 도총부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도총관은 명예직으로 수여되는 경우가 많았다. 1783년(정조 7) 정조는 강세황(姜世晃)을 특별히 승진시켜 도총관으로 삼았는데, 강세황의 나이가 71세였다. 또한 1794년에 이시수(李時秀)를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관으로 삼았는데, 이시수가 금방 상을 마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도총관은 더 이상 군무(軍務)를 맡는 중책이라기보다는 임시로 부여되는 명예직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변천

도총관의 임무가 명예직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정조대라고 생각된다. 1777년 궁궐 내의 숙위를 숙위대장(宿衛大將)이 관할하면서 위장(衛將), 부장(部將), 금군도감(禁軍都監)의 군병, 각 문의 수문장(守門將), 국별장(局別將), 궁궐 담장 밖 삼영(三營)에서 입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모두 숙위대장에게 소속되었다. 그리고 도총부와 병조가 궁궐을 순찰하려면 숙위대장에서 공문을 보내야 했으므로 도총관이 숙위를 담당할 여지가 없어졌다. 더욱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5위를 중심으로 하는 군제가 약화되어 오위도총부가 명색만 남고 쇠잔해져서 숙위에 임하는 경우가 없었다. 때문에 도총관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관제 개편 때 감생청(減省廳)에서는 5위의 군제가 실속 없이 헛된 명성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도총부를 혁파하고 총관은 모두 없애, 도총관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