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위(宿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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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궁성 안팎에서 주야로 시행한 군사적 경호 활동.

개설

조선전기 숙위는 중앙군의 핵심인 오위(五衛)와 금군(禁軍)에서 담당하였으며, 숙위의 구체적인 내용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입직(入直), 행순(行巡), 계성기(啓省記) 조항 등에 규정되었다. 숙위군은 입직 후 궁궐의 동소(東所), 서소(西所), 남소(南所), 북소(北所)의 네 곳에 분산 배치되어 중소(中所)의 통솔을 받았으며 3일마다 교체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후기 오군영(五軍營) 체제하에서도 대체로 동일하였지만 장용영(壯勇營)의 치폐, 고종의 경복궁 이어 등에 따른 변동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숙위는 숙(宿)과 위(衛)의 합성어로서 ‘숙’은 숙직한다는 의미이고 ‘위’는 호위한다는 의미로서 숙위의 원초적인 의미는 ‘궁궐 안팎에서 숙직하며 호위한다.’이다. 장기간 군주제가 지속된 한국과 중국에서는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숙위가 고대로부터 발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과 고려시대의 숙위를 참조하여 다양한 숙위 활동이 있었다.

군주제도의 특성상 조선시대 역시 건국 직후부터 숙위가 중요시되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직후 반포된 문무 관제에 의하면 숙위는 중추원(中樞院)에서 담당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하지만 건국 직후의 혼란 상황에서 숙위는 일정한 제도 없이 변천을 계속하다가『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해 안정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숙위는 병조(兵曹)의 무비사(武備司)에서 관장하였으며, 직접적으로는 중앙군인 오위와 금군에서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숙위 근무에 관련된 입직, 근무 중 순찰과 관련된 행순, 업무보고서인 계성기 작성 등의 규정이 있는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입직은 장수와 군사가 궁궐에 들어가 근무를 서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숙직도 포함하였다. 입직하는 장교와 병졸은 3일 만에 교대하였는데, 오위는 각 1부(部)씩 입직하되 그 전일 저녁에 병조가 그 담당 지역과 시간을 나누어 정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도총부(都摠府)에 공문을 보냈다. 도총부는 접수한 공문을 해당 부로 보내 입직하도록 하였다. 입직 부는 궁궐의 동소, 서소, 남소, 북소의 네 곳에 분산 배치되어 중소의 통솔을 받았다. 중소에서는 병조의 당상관 1명, 도총부의 당상관 2명이 숙직했다. 입직하는 날 제장(諸將)은 숙배하고 대궐 안에서 패를 받았다가 입직 교대 일에 패를 반납하였다. 입직 병력 중에서 위장(衛將)부장(部將)은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야간 시간을 배분하여 순찰한 다음 무사 여부를 왕에게 직보(直報)하였다. 이 같은 숙위 제도는 조선시대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경호 활동을 대표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숙위는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 제도가 성립되면서 크게 변화되었다. 그 이유는 숙위가 근본적으로 군사제도와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전기의 오위 체제 및 금군 조직인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가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과 용호영으로 바뀜에 따라 숙위 역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왕의 상주 공간이 조선전기의 경복궁에서 조선후기의 동궐(東闕)로 변화하고 장용영의 설치와 폐지라는 상황 변화 역시 숙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02년(순조 2)의 장용영 혁파는 이후의 정치, 경제, 군사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숙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혁파 이전의 장용영이 궁궐 숙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혁파 이전의 장용영은 명정전(明政殿) 서월랑, 인정문(仁政門) 밖 월랑, 집례문(集禮門), 동룡문(銅龍門), 건양문(建陽門) 등 동궐의 주요 구역에서 숙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이 혁파되자 이 구역을 다른 부대에서 대체 숙위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숙위 구도가 변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장용영 창설 이전의 3군문과 금군 중심의 궁궐 숙위 체제로 환원하는 것이었지만, 단순한 환원이 아니라 정조에 의해 강화된 궁궐 숙위를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장용영이 담당했던 궁궐 숙위는 주로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이 대체하였다. 장용영에서 입직하였던 명정전 서월랑에는 훈련도감의 무예별감(武藝別監)이 계속 입직하였으며 집례문(후에는 숭지문)에는 훈련도감의 국출신이 대신 입직하였다. 동룡문과 건양문의 입직은 금위영에서 담당하였다. 인정문 밖의 월랑에는 장용영에 통합되었다가 장용영의 혁파를 계기로 분리되어 나온 호위청(扈衛廳)의 군관(軍官)이 계속 입직하였다. 이 결과 장용영 혁파 후의 동궐 숙위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御營廳)의 3군문과 함께 용호영(龍虎營), 호위청 등의 금군 및 4소, 수문장청(守門將廳), 선전관청(宣傳官廳), 내병조(內兵曹) 등의 병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동궐의 숙위 체제는 궁성외 숙위, 궁성문 수위, 궁성 내 숙위로 구성되었다. 궁성 외 숙위는 훈련도감의 남영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금위영의 서영(西營) 입직군, 어영청의 동영(東營)과 집춘영(集春營) 입직군이 담당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영조대의 3군문 궁성 외 숙위 체제로 환원된 것이었다. 궁성 외 숙위는 초경부터 5경까지 궁성 밖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되는 3군문의 순라를 기본으로 3군문이 각각의 담당 구역을 특별 순라하는 별순라와 순라 활동을 감찰하는 도순(都巡)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성문 수위는 수문장과 수문병이 담당하였다. 동궐에는 9명의 수문장이 9곳의 궁성문을 수위하였다. 궁성 내 숙위는 4소, 궐내 각문, 정전 등에 입직하던 도총부 병력, 훈련도감 병력, 금위영 병력, 용호영 병력, 호위청 군관, 선전관 등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도총부와 내병조에 의해 감찰되었다. 결국 장용영이 혁파된 후의 순조대 동궐 숙위는 장용영 창설 이전의 3군문 중심의 궁궐 숙위 체제로 환원하는 한편 정조에 의해 강화된 궁궐 숙위를 일정 부분 반영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동궐 숙위 체제는 고종이 즉위하고 경복궁으로 옮겨가면서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했다. 경복궁의 숙위는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변수와 함께 경복궁의 지형적 특성 및 삼군부 복설 등에 의해 동궐과 다른 숙위 체제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동궐의 숙위체제에서 동일한 부분은 무엇보다도 숙위 담당 부대가 같다는 것이었다. 즉 경복궁이나 동궐의 숙위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부 병력을 비롯하여 용호영과 호위청의 병력 그리고 번상기병 등이 담당했던 것이다. 또한 숙위 체제가 궁성 외 숙위, 궁성문 수위, 궁성내 숙위 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점도 다르지 않다. 아울러 도총부의 사소에서 궁성 안을 분담하여 감독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경복궁의 궁성 외 숙위는 동궐과 마찬가지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서 분담하여 담당했다. 훈련도감은 건춘문(建春門)부터 영추문(迎秋門)까지 주로 남쪽 방향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건춘문 밖에 남영을 설치하였으며, 담당구역 안에 7곳의 군포를 배치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남영에 입직한 당상장관(堂上將官) 1명, 파총(把摠) 1명, 집사(執事) 1명, 군사 36명, 칠군색 40명 그리고 7곳의 군포에 입직한 28명이었다.

금위영은 건춘문부터 춘생문(春生門)까지 주로 동쪽 방향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춘생문 밖에 동영을 설치했으며, 담당 구역 안에 7곳의 군포를 배치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동영에 입직한 파총 1명, 초관(哨官) 1명, 군사 20명 그리고 7곳의 군포에 입직한 28명이었다. 어영청은 영추문부터 추성문(秋成門)까지 주로 서쪽 방향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영추문 밖에 서영을 설치했으며, 담당 구역 안에 7곳의 군포를 설치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서영에 입직한 파총 1명, 초관 1명, 군사 20명 그리고 7곳의 군포에 입직한 28명이었다. 경복궁의 궁성 외 숙위는 궁성 전체를 살펴보는 순라가 폐지되고 각각의 담당구역만 살펴보는 순작(巡綽)과 고찰을 통해 감독되었다. 이는 평탄한 경복궁의 지형적 특성이 원인이었다.

궁성문은 동궐과 마찬가지로 수문장과 수문병이 수위하였으며, 수문병은 교대로 근무하는 번상기병이었다. 다만 동궐에서는 9곳에 수문장이 배치되었지만, 경복궁에는 4곳만 배치되었다. 수문병은 대략 200명 정도의 번상기병이었다. 이외에 궁성 안의 광화문(光化門)에 60명, 건춘문에 100명, 영추문에 100명, 신무문에 30명, 춘생문에 20명, 추성문에 20명, 그리고 승화문(承華門)에 45명의 삼군문 병사들이 배치되어 외궁장과 내궁장의 파수를 분담했다. 이들은 도총부의 4소와 내병조가 감찰하였다.

외궁장 파수는 외궁장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비해 내궁장 파수는 일부 구역이 제외되었다. 그 이유는 근정전 앞쪽의 정전 구역을 용호영과 호위청의 병력들이 경호했기 때문이었다. 용호영의 입직군은 100명, 호위청의 입직군은 30명이었다. 이처럼 고종의 경복궁 이어 후 숙위 역시 기본 구도는 조선후기의 동궐 숙위 체제, 나아가 조선전기의 궁궐 숙위 체제와 대체로 유사하였다. 이는 왕이 어느 궁에 머물던 또는 중앙군의 제도가 어떻든 관계없이 숙위의 근본 목적이 바로 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경호활동이라는 면에서 동일하였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육군사관학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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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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