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官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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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의 관서(官署)·관직(官職)·관원(官員)의 위계 체계.

개설

관계(官階)는 고려초에 당(唐)나라의 문산계(文散階)를 수용하여 성립하였다. 관서·관직 체계가 정비되자 관서·관직의 위계를 포괄하였다. 14세기 초에 체계가 바뀌었고, 점차 문반은 문산계로 무반은 무산계(武散階)로 편제하였다. 조선 세종대에 문산계·무산계·종친계(宗親階)·의빈계(儀賓階)·토관계(土官階)·잡직계(雜職階) 등으로 분화·정비되었고, 관계가 관직에서 분립(分立)하여 독자의 편제 기준으로 확립되었다. 『경국대전』의 관계는 조선말 일본을 본떠 관계가 개혁될 때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관계는 관서·관직·관원의 위계 체계이다. 관서의 위계는 최고 관직의 관계에 따라 정1품아문·종1품아문 등으로, 관직은 그 관계에 따라 정1품직·종1품직 등으로, 관원은 관계에 따라 정1품관·종1품관 등으로 각각 위계를 정하였다. 관계는 산계(散階), 품계(品階), 자급(資級), 자격(資格), 산관(散官)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산계는 주로 실직(實職) 또는 직사(職事)에 대하는 말이고, 품계는 정·종 각 9품과 그 아래의 계를 합하여 칭하는 말이다. 자급·자격은 관원의 서열과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주로 나타내는 말이며, 산관은 관계 또는 관계만을 지닌 관원을 일컬었다.

1) 고려의 문산계와 무산계

관인의 서열 체계로 삼국시대에는 관등(官等)이 있었다. 고려초에 태조가 신라의 관등을 채택한다고 하였으나 태봉의 위계도 같이 쓰였다. 광종 때부터 중국의 문산계가 수용되어, 성종대에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당나라의 문산계를 위계 체계로 정하였다. 이전부터 써오던 관계는 향직(鄕職)으로 되었다가 소멸하였다.

고려의 관계는 문산계를 관인층 전체에게 주었고, 무산계는 관인이 아닌 여진의 추장이나 은퇴한 향리 등에게 명예로 주었다. 당시 관인층은 관직을 기준으로 편제하였기 때문에 관계 외에 산직 체계가 마련되어 6품 이상은 검교직으로, 7품 이하는 동정직으로 편제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관인은 관계와 관직 즉, 정직(正職) 또는 검교직·동정직을 가졌다.

관인층 전체를 편제한 고려 문산계의 틀은 정1품이 없고 5품 이상의 대부(大夫)와 6품 이하의 낭(郎)으로 짜였는데, 대부의 계수(階數)가 적고 낭의 계수가 많았다.

2) 고려말 관계 틀의 변화

고려 관계의 틀은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에 크게 바뀌었다. 정1품을 설치하고 대부의 계선을 4품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였다. 낭계의 수가 줄어든 반면에 대부의 품계 수가 크게 늘어났다. 편제의 중심축이 낭계에서 대부계로 바뀐 것이다.

이는 경관(京官)-향리(鄕吏)의 틀이 무너지고 관인 사족층이 크게 증가하여 유향품관(留鄕品官) 내지 재지사족(在地士族)이 보편화되는 고려후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개혁이었다. 고려의 관리 전체를 편제하는 틀에서 조선의 관인 내지 사족층을 편제하는 틀로 바뀌어간 것이었다. 이와 함께 무산계가 서반을 편제하는 틀로 자리 잡아갔다.

3) 조선의 문·무산계와 양반

조선 개국 초의 관계는 공민왕 때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달라진 점은 7품 이하의 정·종품을 구분하고 5·6품의 단계(單階)를 쌍계(雙階)로 바꾼 것, 종2품 이상의 무산계를 없앤 것이다. 7품 이하를 정·종으로 나눈 것은 참하(參下)에서 단계적 차등을 강화한 것이며, 5·6품의 정·종 쌍계는 참상(參上) 낭계의 단계를 강화한 것이다. 이는 가자(加資)를 계 단위로 하는 만큼 상위 관계에 오르기가 어렵게 되어 관계 자체로 승진을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종2품 이상의 무산계를 없앤 것은 당상관(堂上官) 계선의 하향 조정을 반영하였다. 곧, 재추(宰樞)에서 2품 이상 당상관으로 바뀌어가자, 아직 실직으로 당상관을 정하였으나, 서반 관계에서 종2품 이상을 없애고 정3품 상계(上階)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상한으로 하였던 것과 같다.

조선의 관계는 처음부터 동반과 서반, 곧 양반(兩班)의 틀로 짜였다. 동반은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 30계, 서반은 정3품에서 종8품까지 12품 20계였다. 또 문무의 유품(流品) 외에 따로 환관직(宦官職)·내수직(內竪職)·악공직(樂工職)을 두되 산관과 직사의 칭호를 달리하여 섞이지 않도록 하여 관계의 분화를 예고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4) 세종의 산관 분립과 관계의 분화

관계의 분화·정비는 관계가 직사 즉, 관직에서 분립한 것과 짝을 이루면서, 각각의 직사마다 별도의 산계를 두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관원의 인사 관리를 강화하고 1430년(세종 12) 말 근무 기간에 따라 관리를 승진시키는 순자법(循資法)이 마련되면서 관계의 중요성은 더해졌다. 1434년 관계의 명칭 없이 다만 품에 따라 관직을 정·종으로 구분하던 토관의 관계를 정하였다[『세종실록』 16년 4월 21일]. 1436년에는 서반에 9품 관계를 두었으며(『세종실록』 18년 윤6월 19일), 이어 1438년에는 토관의 서반 9품 관계도 두었다(『세종실록』 20년 7월 14일).

1444년 6월 3품 이하 관계가 직사 즉, 관직에서 분립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관계와 관직을 합쳐 써서 제수할 때 빈자리 얻기가 매우 어려워 담당 업무 없이 이름만 갖는 영직(影職)을 주었다. 그런데 영직은 실제 업무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과 실상이 서로 합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계와 관직을 구분하여 실제 업무에 해당하는 관직은 없더라도 관계를 주어 제수에 편하고 명분과 실상을 서로 어울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관직에서 분리·독립한 관계는 인사에서 천거[薦望]하는 기준이 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나는[去官] 이전(吏典)·방패(防牌)·제원(諸員)이나 변경 지역으로 파병되는 군인, 나이 많은 노인에게 관계만을 제수하게 되었다.

1444년 6월에 관품[散官]의 분리·독립을 규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문산관(文散官) 통정(通政) 이하, 무산관(武散官) 절충장군 이하를 산관 즉, 관계로 제수하고, ② 관계만을 지닌 산관의 승음(承蔭)·의물(儀物)·좌죄(坐罪) 등은 다 본품에 따르게 하고, ③ 관계만을 지닌 산관이 예궐(詣闕)·시위(侍衛) 및 중외 차임(差任) 때에는 본품의 대(帶)를 띠게 허용하고, ④ 관계만을 지닌 산관의 좌차는 본품의 끝에 따르고, ⑤ 관계만을 지닌 산관은 봉록(奉祿)은 없고 조회에 참여하지 못하며, ⑥ 직사 즉, 관직이 있었다가 관직을 면한 사람이 결함(結銜)할 때 산관 즉, 관계 위에는 전(前) 자를 칭하지 않고 직사 위에만 전(前)을 칭하고, ⑦ 갑사(甲士)는 직에서 물러나게 된 뒤에 산관의 예를 따르게 하며, ⑧ 산관 즉, 관계는 정액이 없으니 모람하는 폐를 막기 위해, 의정부·육조 당상이 합의·서명하여 계문(啓聞)한 뒤에 제수를 허하며, ⑨ 통정·절충장군의 관계는 특지(特旨)가 아니면 제수하지 못한다.”

관계가 관직에서 분리·정립된 뒤 양민과 천민이 섞이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정5품에서 종8품까지의 잡직계를 마련하였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5일]. 1448년에는 아악서(雅樂署)의 양인 악공을 전악서(典樂署)의 천인 악공과 구분하기 위해 따로 종품만으로 종5품~종9품의 관계를 두었다(『세종실록』 30년 2월 5일). 또한 봉군한 공신과 구별하기 위해 부마들의 의빈계를 마련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1일). 이와 함께 이성제군부(異姓諸君府)를 부마부(駙馬府)로 개칭하였다. 1447년에는 서반 관계를 9품까지 갖춘 데 짝하여 서반 6품 이하에도 각기 정·종의 관직을 두어 동반과 같은 틀을 갖추었다(『세종실록』 29년 10월 23일).

1457년 1월에는 종친계가 문무관의 예로 정비되었다(『세조실록』 3년 1월 20일). 관계가 신분의 기준 역할을 함에 따라 종친의 관계 자체를 문무관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5) 『경국대전』의 관계 체계

조선초를 거치면서 정비된 관계는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종친계는 무계(無階)인 대군(大君)·왕자군(王子君) 아래 정1품~정6품에 각 쌍계로 두었고, 의빈계는 정1품~종3품에 각 쌍계로 두었다. 동반은 정1품~종6품은 쌍계이고 정7품~종9품은 단계로 두었고, 서반은 정3품~종6품은 쌍계이고 정7품~종9품은 단계로 두었다. 천인을 대상으로 하는 잡직계는 동서반이 정·종6품은 쌍계이고 정7품~종9품은 단계로 두었고, 토관계는 동서반을 정5품~종9품까지 단계로 두었다. 관직은 관계의 틀에 따라 두었으므로, 예우직인 종친·의빈을 제외하면 동반직은 정1품~종9품, 서반직은 정3품~종9품, 잡직은 정6품~종9품, 토관직은 정5품~종9품에 각각 두었다. 그리고 내명부(內命婦)의 직은 왕궁의 경우 정1품~종4품까지, 세자궁의 경우 종품으로 2품~5품까지 두었다. 궁인직(宮人職)은 왕궁에는 정5품~종9품까지 2~4개를 두었고, 세자궁에는 종품으로 6품~9품에 2, 3개를 두었다. 외명부(外命婦)는 종친 처의 경우 정1품~정6품에 각 품마다 두었으며, 문무관 처의 경우 정1품~종9품에 각 품마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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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관계에 따른 차별 대우[差待]는 복식(服飾)·녹봉(祿俸)·가사(家舍)·분묘(墳墓) 등에 계서(階序) 규정으로 나타났다. 관계는 조선초 사회 발전에 따라 분화한 여러 신분층을 관직에 범주적으로 포섭할 필요에서 분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관직도 정직·체아직(遞兒職)·영직·노인직(老人職) 등으로 분화하였다. 관계가 관직에서 분리·독립함으로써, 지배층은 물론 양천제의 다양한 계층을 효율적으로 편제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였다.

추상(抽象)의 기준으로 확립한 『경국대전』의 관계는 조선말까지 그 틀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박용운, 『고려시대 관계·관직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7.
  •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1980.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남지대, 「조선초기 산계[관품]의 구조와 기능」, 『한국문화』 13,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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