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악서(典樂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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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궁중 조회의 속악을 담당하던 음악 기관.

개설

조선시대 전악서는 고려시대의 전악서를 이어 1392년(태조 1) 7월 아악서와 함께 설치되었다. 아악서가 제례 아악의 등가(登歌)헌가(軒架)의 악기 연주를 담당한 것에 비해, 전악서는 빈객을 접대하는 연향(宴享) 음악을 베풀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다. 1457년(세조 3) 무렵, 향악(鄕樂)아악(雅樂)이 별개가 아닌데도 전악서와 아악서를 따로 두어 재정 지출이 과다하다면서 전악서를 아악서와 합쳤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전악서에서 향악·당악(唐樂)뿐 아니라 아악 연주도 함께 담당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제례 음악인 아악을 중시하여 아악서를 따로 두고, 전악서는 연향과 조회의 속악(俗樂)만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전악서에는 기생의 자녀와 공천(公賤) 출신의 악공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1434년(세종 16) 향악 악공과 당악 악공을 합하여 190명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전악(典樂), 부전악(副典樂), 전율(典律), 부전율(副典律), 직율(直律) 등의 잡직을 제수받았다. 1409년(태종 9)에는 전악서의 전악과 부전악이 각 1명, 전율이 4명, 부전율이 5명, 직율이 6명이었는데, 전악은 사성랑(司成郞) 종5품, 부전악은 조성랑(調成郞) 종6품, 전율은 사협랑(司協郞) 종7품, 부전악은 조협랑(調協郞) 종8품, 직율은 조절랑(調節郞) 종9품이었다.

전악서의 악공은 문소전(文昭殿)휘덕전(輝德殿)의 제사, 전정(殿庭) 고취(鼓吹), 왕이 거둥할 때 타는 마차인 대가(大駕)의 전후부 고취, 동궁(東宮)의 고취 등을 담당하였다. 이때 이들은 향악과 당악의 속악(俗樂) 연주, 문·무무(文武舞)의 가공(歌工)과 잡기(雜技)의 역할을 했다.

변천

1431년에는 본래 1명이었던 전악을 2명으로 늘이고, 전율과 부전율은 각각 1명씩 줄였다. 전체적인 전악서 악공의 수는 그 역할에 비해 적다고 하여 악공의 수를 점차 늘렸고 1448년에는 3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457년 향악과 아악이 본래 하나인데 각각 관서와 제사 관원을 따로 두어 낭비가 심하다 하여, 전악서는 아악서와 합쳐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국립국악원 편,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신라 음성서에서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국립국악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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