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명부(內命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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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작을 받고 궁중에서 근무하던 후궁과 궁녀의 총칭.

개설

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의 후궁과 궁녀는 통칭하여 여관(女官)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내명부의 후궁과 궁녀가 양반 관료 즉, 남관(男官)에 대응하는 존재로 인식된 결과이다. 내명부의 후궁과 궁녀는 명칭뿐만 아니라 조직에서도 양반 관료 조직에 대응하였다. 즉 조선시대 양반 관료 조직은 크게 5품에서 9품까지의 사(士)와 1품에서 4품까지의 대부(大夫)로 구분되었는데, 내명부의 조직도 5품에서 9품에 이르는 궁관(宮官)과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내관(內官)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사와 대부가 합쳐진 사대부는 남자 관료 즉 남관이었고, 후궁과 내명부는 여자 관료 즉 여관이었다. 내명부는 비록 여관이라고 불렸지만, 내관은 왕의 첩으로 존재하였고 궁관은 궁궐 안 왕족들의 생활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몸종과 같은 존재였다. 갑오개혁 때 내명부는 외명부와 통합되어 명부사(命婦司)로 바뀌었다. 대한제국기에 명부사는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내명부와 외명부 모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서 일부일처제가 강조되면서 왕의 경우에도 왕비는 1명으로 한정되고 나머지 배우자들은 후궁으로 차별되었다. 조선시대의 후궁 제도는 세종대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비되었으며 그것이 훗날 『경국대전』의 내명부 조항으로 법제화되었다. 세종 이전에는 일정한 제도에 의한 후궁 봉작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고려시대의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예컨대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난 후, 김원호의 딸은 물론 유준의 딸과 원상의 딸, 그리고 관기(官妓) 칠점생 등을 후궁으로 들였다. 이들에 대한 후궁 봉작명은 옹주(翁主)였다. 즉 유준의 딸은 정경옹주(貞慶翁主), 칠점선은 화의옹주(和義翁主)에 봉해졌던 것이다. 정경옹주에 봉해졌던 유준의 딸은 1406년(태종 6) 5월에 정경궁주(貞慶宮主)가 되었다. 이로써 조선 건국 직후 왕의 후궁은 옹주 또는 궁주 등에 봉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왕의 후궁 중에는 봉작되지 않은 후궁도 있었다. 이는 당시에 후궁 제도가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조선 건국 직후 후궁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들이 후궁을 뽑아 들이게 되자 양반 관료들은 후궁 제도를 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은 태조대부터 있었다. 1397년(태조 6) 3월 5일에 태조가 김원호의 딸을 후궁으로 뽑아 들이자, 10일 후에 조준, 정도전 등은 상소문을 올려 내관의 칭호를 세울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준과 정도전이 제안한 내관의 칭호에는 정1품 현의(賢儀)에서부터 종9품의 사식(司飾)까지 9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내관 칭호가 곧바로 후궁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당시 조준과 정도전의 건의는 후궁 제도를 정비하려는 최초의 노력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태종은 조준과 정도전의 노력을 뒤이어 후궁 제도를 정비하고자 했다. 계기는 왕비 원경왕후 민씨와의 갈등이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원경왕후 민씨의 본방나인이었던 김씨를 가까이 하다가 원경왕후에게 발각되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궁인을 가까이 하므로 원경왕후 민씨가 분개하고 노하여 가까이 했던 궁인을 힐문하니 태종이 노하여 그 궁인을 내쳤다고 하는데, 그 궁인이 바로 김씨였다. 하지만 태종은 그 기회를 이용해 후궁 제도를 정비하고자 했다.

1402년(태종 2) 1월 태종은 예조에 명령하여 중국의 삼대(三代) 이하 역대 후궁 제도 및 고려시대의 후궁 제도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했다. 이에 따라 1402년 1월 8일에 예조에서 중국의 역대 후궁 제도 및 고려시대의 후궁 제도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핵심적인 내용은 ‘제후는 한 번 장가들 수 있고 부인은 9명까지 둘 수 있으며, 제후가 한 나라에 장가들면 다른 두 나라에서 잉첩(媵妾)을 보내 모두 조카나 동생으로 따라가게 하며, 경대부는 1처 2첩이고, 사(士)는 1처 1첩’이라고 하는 유교 경전에 입각하여 후궁 제도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태종은 윤허하였고 당시의 후궁 제도는 예조의 보고에 입각하여 정비되었다. 그런데 당시 예조에서 보고한 후궁 제도는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였다. 즉 ‘제후는 한 번 장가들 수 있고 부인은 9명까지 둘 수 있으며’라는 내용을 기준으로 한다면 왕이 본부인 1명, 후궁 8명을 가지는 것으로 되는 반면 ‘한 나라에 장가들면 다른 두 나라에서 잉첩을 보내 모두 조카나 동생으로 따라가게 하며’라는 내용을 기준으로 한다면 왕이 본부인 2명, 후궁 2명을 가지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둘 중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후궁 제도가 정비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402년 1월 이후의 상황을 보면 ‘제후는 한 번 장가드는데 9녀를 얻고’라는 내용을 기준으로 후궁 제도를 정비한 것이 확실하다. 태종은 1402년 3월 7일에 권홍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 후로도 여러 명의 후궁을 맞아들였다. 또한 궐 밖으로 내쳤던 원경왕후 민씨의 본방나인 김씨 역시 궁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이 결과 1405년 1월 15일에 후궁과 관련된 여관 제도가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에 의하면 여관에는 현의 1명, 숙의(淑儀) 1명, 찬덕(贊德) 1명, 순덕(順德) 1명, 사의(司儀) 1명, 사침(司寢) 1명, 봉의(奉衣) 1명, 봉선(奉膳) 1명 등 8가지로 구체화되었다.

1411년 9월 19일 예조에서는 비빈 제도에 대하여 또 다른 내용을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제후 부인은 3궁을 세우는데, 대국의 부인은 3궁 3세부(世婦) 5처(妻) 27첩(妾)을 세운다.” 하는 『예기』의 내용을 근거로 후궁으로는 3세부 5처를 갖추고 그 칭호는 3세부는 빈으로 하고 5처는 잉(媵)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즉, 후궁을 8명으로 하고 그 후궁을 3명의 빈과 5명의 잉으로 구분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태종은 1빈과 2잉으로 하게 하였는데, 이는 후궁의 수를 8명이 아니라 3명으로 제한하자는 내용이었다. 태종과 예조 사이에서 후궁의 수에 대하여 이견이 있기는 했지만 후궁을 단순하게 빈·잉으로만 구분한 것은 동일하였다. 이는 당시에 후궁의 수는 물론 후궁의 구체적인 명칭이나 서열도 완전하게 정비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태종 당시의 여관 제도 정비는 후궁 자체에 집중되어 있었고, 궁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후궁과 궁녀를 포함한 여관 제도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내명부 제도가 정비된 것은 세종이 즉위한 이후였다. 1428년(세종 10) 3월 8일에 여관 제도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는데, 당시에는 당나라 때의 후궁 제도를 기준으로 하였다. 먼저 후궁은 내관, 궁녀는 궁관이라고 하여 후궁과 궁녀를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후궁과 궁녀는 품계를 기준으로 서열을 정하고 각각의 서열에 따라 명칭을 부여하였다. 후궁은 정1품의 빈(嬪)귀인(貴人), 정2품의 소의(昭儀)숙의(淑儀), 정3품의 소용(昭容)과 숙용(淑容), 정4품의 소원(昭瑗)과 숙원(淑瑗)으로 크게 4단계로 구분되었다. 정1품의 빈과 귀인의 직무는 부녀자의 예[婦禮]를 논하는 것이고 정원은 정하지 않았다. 정2품의 소의와 숙의(淑儀)의 직무는 왕비가 갖추어야 할 법도와 예절[妃禮]을 자문하고 조언하는 것[贊導]이고 정원은 각각 1명이었다. 정3품의 소용과 숙용의 직무는 제사와 손님[賓客]의 일을 맡고 정원은 각각 1명이었다. 정4품의 소원과 숙원의 직무는 왕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燕寢]을 관장하고, 실[絲枲]로 명주와 모시를 길쌈해 해마다 바치는[獻功] 것이고 정원은 각각 1명이었다. 요컨대 후궁을 모두 4단계의 8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의 후궁을 품계와 명칭 및 업무로 구체화하였던 것이다. 이는 태종 때에 후궁을 8명으로도 하고 3명으로도 하던 것을 8종류의 후궁으로 확정하고 각각의 후궁을 품계와 명칭 및 업무로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궁녀인 궁관 제도는 다음과 같이 정비되었다. 궁녀는 정5품의 상궁인(尙宮人)·상의(尙儀)·상복(尙服)·상식(尙食)·상침(尙寢)·상공(尙功)·궁정(宮正)과, 정6품의 사기(司記)·사빈(司賓)·사의(司衣)·사선(司膳)·사설(司設)·사제(司製) 그리고 정7품의 전언(典言)·전찬(典贊)·전식(典飾)·전약(典藥)·전등(典燈)·전채(典綵)·전정(典正) 등의 3단계로 구분하였다.

정5품의 경우, 상궁인은 중궁(中宮)의 인도(引導)를 맡으며 사기와 전언을 통솔하는데 정원은 정하지 않았다. 반면 정5품의 상의는 예의(禮儀)와 기거(起居)를 맡으며 사빈과 전찬을 통솔하였다. 상복은 복용(服用)·채장(采章)의 수량 공급을 맡으며 사의와 전식을 통솔하고, 상식은 음식[膳羞]과 각종 술[品齊]의 공급을 맡으며 사선과 전약을 통솔하였다. 상침은 낮에 모시거나[燕見] 밤에 모시는[進御] 차례[次序]를 맡으며 사설과 전등을 통솔하고, 상공은 여성 노동[女功]의 부과[課程]를 맡으며 사제와 전채를 통솔하였다. 궁정은 훈계 명령[戒令]·금지 명령[糾禁]·처벌[謫罰]의 일을 맡는데 정원은 각각 1명이었다.

정6품의 경우, 사기는 궁 안의 문서[文簿]와 출입을 맡고, 사빈은 궁중 손님[賓客]·국왕 알현[朝見]·잔치 모임[宴會]·상품 하사[賞賜]를 맡았다. 사의는 머리 장식품인 수식(首飾)과 의복을 맡고, 사선은 삶는 요리[制烹]와 볶는 요리[煎和]를 맡았다. 사설은 위장(幃帳)·인석(茵席)·쇄소(灑掃)·장설(張設)을 맡고, 사제는 의복과 바느질[裁縫]을 맡았다. 정원은 각각 1명이었다.

정7품의 경우, 전언은 왕명 전달[宣傳]과 업무 보고[啓稟]를 맡고, 전찬은 궁중 손님[賓客]·국왕 알현[朝見]·잔치 음식[宴食]·행사 진행[贊相]·손님 인도[導前]를 맡았다. 전식은 화장품[膏沐]과 수건 및 빗[巾櫛]을 맡고, 전약은 처방에 따라 약을 지었다[方藥]. 전등은 등불과 촛불[燈燭]을 맡고, 전채는 비단[縑帛]과 실[絲枲]을 맡았으며, 전정은 궁정(宮正)을 도와주는 일을 하였다. 정원은 각각 1명이었다.

요컨대 1428년 3월 8일에 정비된 궁녀 제도에서는 궁녀를 정5품, 정6품, 정7품의 3단계와 정5품 7종, 정6품 6종, 정7품 7종의 20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의 궁녀를 품계와 명칭 및 업무로 구체화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제도 정비에 의해 조선 건국 이후 후궁과 궁녀가 구분되지 않던 상황은 완전하게 극복되었다. 세종 때에 정해진 후궁 제도와 궁녀 제도는 품계와 종류 등에서 조금 더 세분화하여 『경국대전』「이전(吏典)」 ‘내명부’ 조항에 실렸고 이로써 조선시대 후궁 제도와 궁녀 제도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명부의 조직은 양반 관료 조직에 대응하였다. 즉 조선시대 양반 관료 조직은 크게 5품에서 9품까지의 사와 1품에서 4품까지의 대부로 구분되었는데, 내명부의 조직도 5품에서 9품에 이르는 궁녀와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후궁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후궁은 정1품의 빈, 종1품의 귀인, 정2품의 소의, 종2품의 숙의, 정3품의 소용, 종3품의 숙용, 정4품의 소원, 종4품의 숙원이었다. 이 후궁들이 양반 관료 중 4품 이상의 대부에 대응하였다.

아울러 양반 관료의 사와 마찬가지로, 5품에서 9품에 이르는 궁녀는 7품을 경계로 하는 양반 관료들의 4~6품까지의 참상관(參上官)과 7~9품까지의 참하관(參下官)에 따라 또다시 명칭이 구별되었다. 즉 5품에서 6품은 상궁, 상의 등 상(尙)이라는 말 다음에 구체적인 업무 내용이 들어가고, 7품에서 8품까지는 전빈(典賓), 전의(典儀) 등 전(典)이라는 말과 함께 담당 업무가 들어갔다. 9품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주(奏) 다음에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5음(音)이 들어가 있다.

이 같은 명칭과 품계만 놓고 보면 궁녀가 의례나 의식주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궁녀와 음악을 연주하는 궁녀로 양분된 듯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궁녀의 명칭과 업무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에는 궁녀의 정원이 명시되지도 않았고 선발 원칙도 명시되지 않았다. 결국 『경국대전』의 궁녀에 관한 규정은 다분히 선언적인 것일 뿐이고 실제 궁녀의 선발, 정원 등은 궁중의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명부 규정은 이후 고종대까지 이어지다가 변화를 맞이하였다. 1894년(고종 31) 7월 18일자로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개혁안에 의해 명부사로 바뀌어 궁내부에 소속되었다. 명부사는 이전의 내명부와 외명부가 통합된 것이었다. 하지만 명부사는 대한제국 때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실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910년 12월 30일 이왕직 관제를 공포하였는데, 이왕직에는 서무계·회계계·장시계(掌侍係)·장사계(掌祀係)·장원계(掌苑係) 등 5개의 계가 설치되었다. 그때 내명부의 일부 궁녀들만 장시계에 소속되고 나머지는 내명부의 후궁, 외명부와 함께 완전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관제도연혁(女官制度沿革)』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일지사, 1983.
  • 박상진, 『내시와 궁녀: 제왕의 그림자』, 가람기획, 2005.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 신명호, 『궁녀: 궁궐의 꽃』, 시공사, 2004.
  • 김선곤, 「이조초기 비빈고」, 『역사학보』 21, 1963.
  • 이영숙, 「조선초기 내명부에 대하여」, 『역사학보』 96, 1982.
  • 홍순민, 「조선시대의 궁녀의 위상」, 『역사비평』 68, 2004.
  • 홍순민, 「조선시대 여성 의례와 궁녀」, 『역사비평』 7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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