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기(備忘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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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명령을 간략하게 적어 전달하던 문서나 그 형식.

개설

비망기(備忘記)는 왕이 전교를 내리는 형식의 하나이다. 간략하게 기록하여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승정원(承政院)에 전달하였다. 비망기로 내리는 전교의 내용은 다양하며, 간혹 중요한 정치적 국면 때에 비망기를 내려 왕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왕의 명령을 전하는 형식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교문(敎文)이나 윤음(綸音)과 같이 ‘왕약왈(王若曰)’로 시작되는 형식이 있다. 이외에도 정령(政令)은 ‘전왈(傳曰)’이라 하며, 정령 중에서 조보(朝報)에 반포할 필요가 없는 것은 ‘구전하교(口傳下敎)’라고 칭하였다. 정령 중에서도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한 것과 돈유(敦諭)·별유(別諭)는 모두 비망기로 써서 내렸다. 관원의 상소나 대간들의 모든 상소·차자(箚子)에는 답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말로 하면 전할 때 빠뜨리는 폐단이 있어 비망기의 형태로 적어서 내렸던 것이다(『중종실록』 24년 9월 15일).

왕의 비망기는 승정원의 승지에게 전달되며, 승지는 말로 들은 내용과 비망기를 대조해서 살핀 뒤에 전지(傳旨)를 만들어 올리면서 원래의 비망기를 다시 왕에게 올렸다(『현종실록』 5년 4월 23일). 왕이 내린 비망기 중 승지들이 수긍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한 것은 이를 왕에게 다시 올렸다(『현종실록』 13년 5월 20일). 특정 사안에 부연 설명이 필요할 때는 왕이 주기(註記)를 해서 내렸다. 한편 비망기가 내려지면 관서에서는 서리를 통해 이를 베껴 쓰게 하는데 이때 정서(正書)하지 못하여 틀리는 사례가 많고 뜻이 통하지 않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 비망기로 작성된 문서 중 일부는 중외에 포고되기도 하였다(『현종실록』 11년 5월 3일).

왕이 비망기를 내릴 때에는 특정 사안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적어서 하달하였다. 1537년(중종 32) 10월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의 내용과 유형을 보면, 형벌을 받고 있는 관원 가운데 방송(放送)할 관원의 명단, 특정 관원의 임용과 선발에 대한 지시, 의금부에서 추고하고 있는 사안에 대한 입장 표명 등이 적혀있었다(『중종실록』 32년 10월 27일). 이 밖에도 임꺽정이 도성에 출현한 뒤에 도성의 관리나 대궐문의 개폐(開閉), 관원의 체포 등에 대해서도 비망기로 내렸다(『명종실록』 16년 10월 29일). 국정 사안에 대해서 정승 등에게 문의할 때에도 비망기를 사용하였고(『중종실록』 22년 5월 27일), 특정인의 상소에 대해 답변할 때(『중종실록』 21년 12월 8일), 특정 물품을 특정 관서에 내리도록 지시할 때(『중종실록』 23년 11월 19일), 특정 행사 후 상전(賞典)을 내릴 때(『중종실록』 24년 1월 22일), 천재지변이 발생하였을 때(『선조실록』 2년 8월 27일), 특정인을 조정으로 불러들일 때(『선조실록』 1년 1월 27일) 등에도 역시 비망기를 사용하였다.

또한 특정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왕의 정치적 복심(腹心)을 전달할 때도 비망기가 활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예를 들어 1583년(선조 16)에는 동인 측의 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허봉(許篈)을 귀양 보낸 계미삼찬(癸未三竄)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병조 판서이던 이이(李珥)가 군정(軍政)과 관련된 일을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왕에게 보고한 일 등을 문제 삼아 이이를 공격하였는데 선조는 오히려 그들을 처벌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이이를 옹호하는 동시에 대신들을 질책하면서 조정 내 소인을 제대로 밝혀내도록 지시하였다(『선조실록』 16년 6월 20일). 숙종의 경우도 1680년(숙종 6) 3월에 공조 판서유혁연(柳赫然)과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김만기(金萬基), 포도대장신여철(申汝哲)을 불러놓고서 비망기로 유혁연의 총융사 직임을 해임시키고 대신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총융사에 제수하였다(『숙종실록』 6년 3월 28일). 이때의 군영 대장 제수는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치 주도 세력이 교체되던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신호탄이기도 한 사건이었다.

선조나 숙종 이외에도 왕은 간혹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비망기를 통해 전달하였다. 물론 비망기가 내려지면 이를 전해 들은 신료들은 다시 논의하여 가부에 대한 입장을 왕에게 전달하였다(『중종실록』 39년 9월 29일).

변천

비망기가 어느 시기부터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529년(중종 24) 9월 심정(沈貞)은 비망기를 “조종조에 없었던 일”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에 따른다면 비망기의 사용 시기는 중종 연간을 전후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중종실록』 24년 9월 15일).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보면, 1479년(성종 10) 12월에 이조 좌랑조지서(趙之瑞)가 비망기를 승정원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청하였다(『성종실록』 10년 12월 13일). 이 사례로만 본다면 최소한 15세기 말까지도 비망기의 사용 시기를 소급해볼 수 있다.

이후 비망기는 왕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로 활용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러 그 사례가 빈번해졌다. 또 왕뿐만 아니라 왕대비도 비망기로 명령을 내렸다(『명종실록』 1년 4월 12일).

참고문헌

  • 『은대편고(銀臺便攷)』
  • 『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