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궁(齋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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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재궁 |
한글표제 | 재궁 |
한자표제 | 齋宮 |
상위어 | 능원(陵園) |
하위어 | 개경사(開慶寺), 연경사(衍慶寺), 흥교사(興敎寺) |
동의어 | 재실(齋室) |
관련어 | 건원릉(健元陵), 능찰(陵刹), 능침(陵寢), 왕릉(王陵), 원묘(原廟), 제릉(齊陵), 조포사(造泡寺), 후릉(厚陵) |
분야 | 문화/의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지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재궁(齋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8년 7월 29일, 『연산군일기』 3년 7월 17일, 『중종실록』 12년 12월 17일 |
종묘와 원단, 성균관 등의 제사 시설에 설치된 재실이나 능·원·묘에 소속되어 제례를 주관하고 제사 시설을 관리하던 사찰.
개설
재궁(齋宮)은 종묘와 원단, 성균관 등의 제사 시설에 설치된 재실을 이르는 말이며, 왕실의 능·원에 소속된 사찰을 말하기도 한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 및 문화의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불교적 제례를 버리지 못하였다. 특히 왕실의 상장례에도 불교적 제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408년(태종 8) 태조가 승하하자 상장례를 치루기 위한 도감을 설치하는데, 이때 빈전도감·국장도감·조묘도감·재도감이 설치되었다. 빈전도감은 5개월 동안 빈전에서의 제례와 장사 지낸 이후 혼전 의례를 책임지는 임시 기관이다. 국장도감에서는 빈전에서 관을 발인하여 산릉에서 장사 지내는 모든 일을 담당하였다. 조묘도감은 산릉을 조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와 함께 재도감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불교적인 제례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빈전에서의 법회와 명복, 사십구재와 기신제 등을 담당했다. 그만큼 조선초기에는 불교 의례가 중요하게 설행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왕실의 능과 묘에는 그 부장된 사람의 명복을 빌고 제례를 주관하도록 소속된 사찰을 지었는데, 이것을 재궁이라 했다(『태종실록』 8년 7월 29일).
내용 및 특징
재궁은 왕실의 능묘를 관리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대신 국가로부터 노비와 토지 등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1404년(태종 4)에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에 연경사(衍慶寺)를 창건하고 노비와 경지를 하사하였다. 1408년에는 태조의 건원릉에 재궁을 조성하고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 조계종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노비 150명과 농경지 300결을 주었다. 1411년에는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에 재궁을 지었으며,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에 흥교사(興敎寺)를 지었다. 그러나 태종은 불교를 배척하여 자신의 능에 사찰을 짓지 말라고 하교함에 따라 세종 연간에 태종의 헌릉(獻陵)을 조성할 때에는 재궁을 짓지 않았다.
변천
세종대에 왕실 상장례를 주관하는 임시 기관으로 4도감 중에서 재도감을 혁파하고 빈전도감과 국장도감, 산릉도감만을 설치하였다. 불교 법회도 대폭 줄였으며 태종의 헌릉에 재궁을 짓지 않아 불교 의례를 축소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걸쳐 재궁은 계속 조성되었다. 능원뿐만 아니라 공주 및 대군의 묘소와 일반 사대부의 선산에도 수호를 위한 재궁을 설치하였다. 사대부의 선산으로 기록된 것으로는 숙종 연간에 당시 영의정을 지낸 허적(許積)의 선산에 청룡사(靑龍寺)가 있으며, 숙종의 외숙인 김석주(金錫冑)의 선산에도 재궁이 설치되었다.
1497년(연산군 3)에 성종이 묻혀 있는 선릉(宣陵)의 재궁을 새로 짓는 것에 대해 신료들이 반대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7월 17일). 묘소에 재궁을 세우는 풍습을 빨리 고쳐야 한다면서 재궁에 소속된 토지는 성균관에 소속하도록 요청하였다. 1517년(중종 12)에는 정병(正兵)최숙징(崔淑澄)이 상소를 통해 재궁을 허물고 승도들을 군역에 소속시킬 것을 아뢰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2년 12월 17일). 이와 같이 재궁을 세우는 풍습은 널리 행해졌으며, 특히 왕실에서 운영하는 재궁에는 넓은 토지가 제공되었다. 재궁에 소속된 승려들은 군역을 면제받고 있어 비판받았으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재궁을 설치하는 것은 계속되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