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사(淨水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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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수사 |
한글표제 | 정수사 |
한자표제 | 淨水寺 |
관련어 | 윤증(尹拯), 원당(願堂), 인순공주(仁順公主)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충청남도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수사(淨水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19년 9월 23일 |
중종의 딸인 인순공주의 원당으로, 충청남도 예산에 있던 절.
개설
정수사(淨水寺)는 중종과 문정왕후의 3녀인 인순공주(仁順公主)의 원당(願堂)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윤증(尹拯)의 가문에서 대대로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인순공주는 1542년(중종 37) 5월 22일 태어나 1545년 4살 나이로 일찍 죽었다. 죽은 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에 예장하였는데, 왕실에서는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수사를 원찰(願刹)로 삼았다(『명종실록』 19년 9월 23일).
조선후기에 이르러 정수사는 윤증과 그의 가문에서 학문과 집안의 결속을 다지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정수사 인근에 윤증 집안의 선영(先塋)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증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된 인물이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工曹) 낭(郞)·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윤증은 일찍이 종중(宗中)의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정수사에서 열린 종회(宗會)에서 "노년은 쉽게도 다가와서 아쉽구나 / 누가 있어 내 일을 이어줄 것인가 / 당일에 자손 위해 좋은 계책 세워야지 / 이 모임 만약에 없어지지 않는다면 / 앞으로 사문(유학) 함께 닦을 수 있으리라"는 글을 지었다. 또한 집안 조카들이 정수사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쓴 시에서는 정수사가 ‘우리 집안의 녹동(鹿洞)’이라고 하였다. 녹동은 송나라 주희가 남강군지사로 부임하여 강학을 한 백록동서원을 말한다. 즉 우리 집안의 녹동이라고 한 것은, 정수사가 윤증 집안에서 독서하고 강학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그는 당시 고을 전역에 번진 전염병을 피해 정수사에서 머문 적도 있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명재유고(明齋遺稿)』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2008.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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