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사(安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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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 왕실 비빈들에 의해 중창된 비구니원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었던 절.

개설

안암사(安巖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었지만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조선 건국 초에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따라 중창되었으나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뚜렷한 사격(寺格)을 갖추지 못하였다. 성종 초에는 탑과 무너진 전각만이 남았다가 성종의 후궁인 귀인권씨(貴人權氏)와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 등의 발원으로 중창하였다. 비구니 사찰로 유지되다가 1504년(연산군 10)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존재하다가 조선 건국초에 중창하였다. 1470년(성종 1) 예조에서 산과 하천 등의 토목 공사를 계획하면서 여러 절을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안암사를 비롯하여 국가에서 건립한 사사(寺社)는 철거하지 말고 이전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년 9월 26일). 그 결과 10여 년 후인 1484년(성종 15)에는 절터만 남아 있었다. 탑과 몇 개의 건물만 남아 있던 자리에 귀인권씨가 중창할 뜻을 세우면서 이에 관한 찬반 논의가 3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명분은 귀인권씨의 발원이었지만, 사실은 인수왕대비와 인혜왕대비의 뜻이었다. 곧 절은 국도(國都)의 비보사찰로 창건되었으므로 중창하여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목적이었다. 성종은 이를 허락하고 절에 민전(民田)을 지급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국가에서 절을 중창하는 것은 이단(異端)을 숭상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국왕은 『경국대전』에 절을 새로 짓는 것은 금지하였으나 옛터에 중창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하였으므로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15년 2월 24일).

그런데 당시 절 땅을 3~4인의 백성이 점유하여 소작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적은 수의 백성이지만 그들의 터전을 빼앗는 일은 나라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국왕은 백성들이 무단 점유한 것이므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성종실록』 15년 2월 26일).

그럼에도 신하들의 상소가 그치지 않자 국왕은 왕대비(王大妃)들에게 상소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왕대비들은 비구니들이 경성 안에 거주할 수 없어 부득이 안암사를 중창하는 것이며,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수강궁(壽康宮)에서 철거한 재목을 내려준 것이라고 해명하였다(『성종실록』 15년 3월 1일). 성종과 왕대비 등의 뜻이 분명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 상소는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중창된 후 5년이 지나서도 국왕이 절의 중창에 재목과 기와 등을 지원하였다는 낭설까지 떠돌았다(『성종실록』 20년 6월 28일). 성종은 자신이 불교를 숭상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귀인권씨와 왕대비 등의 개인적인 일이라며 절의 중창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중창되었지만, 1504년(연산군 10) 절은 폐사되고 말았다. 절의 비구니들은 모두 한치형(韓致亨)의 빈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29일). 이후 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황인규, 『마지막 왕사 무학대사』, 밀알, 2000.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 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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