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사(廣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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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광덕산에 있는 절.

개설

광덕사(廣德寺)는 신라하대에 창건되었고 고려중기에 호두나무를 처음 심었다고 한다. 조선초기에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왕의 명으로 일본에 넘겨주었다. 세조대에는 석탑에서 사리가 분신(分身)하는 영험이 있었고, 여러 사리를 왕실에 봉헌하였다. 세조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절의 잡역을 줄이라는 교지를 받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지속적인 중창을 통해 역사를 이어왔고,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사경 등 9점의 보물급 문화재를 배출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통일신라인 832년(신라 흥덕왕 7) 진산(珍山) 화상(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1680년(숙종 6)에 편찬된 「광덕사사적기」에 전하는데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 온 붓다의 사리를 봉안하였다는 등의 내용은 다소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 창건주라는 진산 화상에 대해서도 다른 역사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에는 3층석탑을 조성하였고, 1344년(고려 충혜왕 복위 5) 중창이 있었다. 절에는 이 시대의 『묘법연화경』 사경 8점이 전하는데 고려시대 절의 번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절은 이 지방의 특산물인 호두나무의 최초 식목지로 유명하다. 유청신(柳淸臣)이 원나라에서 처음 들여와 경내에 심었다고 한다.

(2) 조선전기

조선초인 1414년(태종 14) 절의 『대반야경』이 일본으로 반출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사신 규주(圭籌)가 대장경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여주신륵사(神勒寺)의 대장경 인본 전부와 광덕사의 『대반야경』을 주었다(『태종실록』 14년 7월 11일). 조선시대 들어 일본의 대장경에 대한 요구는 집요할 정도로 계속되었다. 조선은 숭유억불의 기조에서 대장경을 중시하지 않았고, 때로는 고려대장경 판본을 통째로 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반출된 신륵사의 대장경은 지금도 무사히 남아 있으나 광덕사의 대반야경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세조대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절의 진신사리가 분신하자 이를 왕실에 봉헌하였다. 또 부인 정씨 등과 함께 『부모은중경』 필사본을 시주하였다. 효령대군은 양주회암사, 오대산상원사, 원각사, 흥천사 등의 불사를 지원하여 조선초기 불교의 흥성을 이끌었다. 1457년(세조 3) 8월 10일 세조는 광덕사와 개천사(開天寺)의 잡역을 경감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1552년(명종 7)에는 온양의 관리들이 밤늦게 절에 들어갔다가 승려들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날이 저물어 절에서 하루 묵을 요량이었지만 도둑으로 오해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두고 신하들은 승려들을 처벌하라고 요청하였지만 명종은 들어주지 않았다(『명종실록』 7년 2월 21일).

(3) 조선후기

절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소실되었다가 1598년(선조 31) 희묵이 중창하였다. 1679년(숙종 6)에 상민(尙敏)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중건하였다. 중건을 마치고 유응운(柳應運) 등이 「광덕사사실비문(廣德寺事實碑文)」과 청소당대사탑명(淸霄堂大師塔銘)을 찬하였다. 1723년(경종 3) 화재가 일어나 500칸의 전각이 전소되었다.(『경종실록』 3년 3월 16일). 1749년(영조 25)에는 노사나괘불탱화를 봉안하였다. 1859년(철종 10)에는 군민들이 힘을 합쳐 사찰 토지에 대한 감세를 요청하였다.

(4) 현대

현대에 들어 1996년 철웅(哲雄) 등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였다. 절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대웅전·천불전·명부전·범종각·적선당·보화루·3층석탑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편집부, 『전통사찰총서 12, 대전·충남의 전통사찰Ⅰ』, 사찰문화연구원, 1999.
  • 이완재, 『(실록)효령대군 일대기』, 한양대학교출판부, 2003.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