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사(迦智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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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현재 전라남도 장흥군가지산에 있는 보림사의 전신.

개설

가지사(迦智寺)는 860년(신라 헌안왕 4)에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창건하였고, 이후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신라말 헌강왕 때는 보림사(寶林寺)라 하였고,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태종 때 자복사찰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다. 18세기 말 정조 때 잠시 폐사되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가지사는 보림사라고도 한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산한 보조체징이 창건하였다. 체징은 헌덕왕 때 당에서 귀국하여 신라에 선법을 전한 도의(道義) 국사(國師)의 선맥(禪脈)을 이어받았고, 860년(신라 헌안왕 4) 헌안왕의 권유로 가지사를 창건하였다. 체징은 현재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해 827년(신라 흥덕왕 2)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도의 국사의 제자인 염거(廉居)에게 법인(法印)을 받았고, 837년(신라 희강왕 2)에는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840년(신라 문성왕 2) 귀국하였다. 무주의 황학사 등에서 머물다가 만년에 헌안왕의 요청으로 가지사를 창건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표(元表)가 머물며 터를 잡은 가지사의 자리에 체징이 절을 중창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가지사에는 원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의 고승 원표가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하던 중 신라에 상서로운 기운이 어린 것을 보고, 고국인 신라에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장흥 가지산에서 참선하던 중 선녀가 나타나 자기가 살고 있던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이에 원표가 못에 부적을 던졌더니 다른 용들은 다 나가고 오직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가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산기슭을 꼬리로 쳐서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서)가 되었으며, 그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고 한다. 체징이 가지사를 창건하기 전에 이미 원표가 주변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절을 창건한 사정을 전하는 설화라고 볼 수 있다. 체징의 비문에도 원표가 머물던 곳이라고 한 것으로 볼 때, 가지사가 처음에는 원표의 수행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지사가 창건되자 헌안왕은 교지를 내려 금 160근과 곡식 2,000곡을 하사하였고, 또 현재의 장흥 지역인 무주 장사현의 부수(副守)인 김언경(金彦卿)은 860년에 사재를 희사해 2,500근의 비로자나불 1위를 조성하여 절의 중창을 도왔다. 현재 남아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상 왼팔의 명문에는 무주 장사현부관김수종(金遂宗)이 시주하여 858년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체징이 입적한 880년 무렵 가지사에는 800여 명의 제자가 머물며 가지산문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884년 헌강왕이 절 이름을 보림사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보림사의 연혁이나 운영 등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원응 국사 학일(學一), 원감 국사 충지(沖止), 각진 국사 복구(復丘), 태고보우(普愚) 등이 주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로 볼 때 고려말까지도 융성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전기

조선전기에 보림사는 가지사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장흥 가지사는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불교의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장흥 가지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이로 볼 때 가지산문의 중심 도량으로 발전한 가지사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까지도 호남 지방의 명찰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후기

조선후기에 이르면 가지사는 다시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언제 이름이 개칭된 것인지는 전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수와 중창을 거듭하며 많은 불사를 이루었다. 1478년(성종 4) 탑을 수리하였고, 1658년(효종 9)부터 1692년(숙종 18)까지 법원전을 시작으로 미륵전, 관음전, 나한전, 향적전, 부도전, 청학료, 백학료, 탕진료, 송월료, 용천료, 영청당, 반야당, 기묘당, 선당, 승당, 사천왕상, 대적광전 등이 중수 또는 중창되었다. 이때 영월청학, 연담유일, 응화유한 등 많은 고승이 주석하였다. 18세기 말 정조 때 절이 잠시 폐사된 듯하나, 이후 다시 중창과 중수를 거쳤다.

(4) 근현대

일제강점기에는 대적광전, 대웅전, 명부전, 응진당, 대향각, 천왕문, 해탈문 등이 남아 있었다. 6·25전쟁 전까지도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비교적 큰 절이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외호문, 사천왕문, 영각 등만이 남게 되었다. 소실되기 전의 대웅전은 당시 국보 제204호로 조선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건축물이었다. 1982년부터 대웅보전, 대적광전, 선원, 조사전, 삼성각, 장서각, 종각,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보림사에는 대적광전, 대웅보전, 장서각, 삼성각, 조사전, 종각, 요사, 사천문, 외호문 등의 전각이 있다.

문화재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 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117호)은 858년에 김수종이 조성을 시작하여, 860년(신라 헌안왕 4)에 김언경이 자신의 녹봉을 모아 완성한 것이다. 철불 가운데 조성 연도가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국보 제44호)은 대적광전 앞에 있는 2기의 석탑으로, 870년(신라 경문왕 10)에 경문왕이 선왕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발원하여 조성하였다. 전형적인 신라 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외에도 사천왕상 복장에서 출토된 『월인석보』 제25권(보물 제745-9호), 『금강경삼가해』 권 제1(보물 제772-3호),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 제9, 권 제10(보물 제1252호),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 및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 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과 사천왕상(보물 제1254호), 그리고 사천왕상 복장유물 수백 점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 절 입구의 숲에 동부도(보물 제155호), 서부도(보물 제156호)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가람고(伽藍考)』
  • 『범우고(梵宇攷)』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