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법석(法華法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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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법화법석 |
한글표제 | 법화법석 |
한자표제 | 法華法席 |
관련어 | 칠칠재(七七齋),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 영산재(靈山齋), 천도재(薦度齋), 추천의식(追薦齋), 관음신앙(觀音信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백일재(百日齋), 회삼귀일(會三歸一)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법화법석(法華法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년 10월 18일, 『세종실록』 2년 10월 14일, 『태종실록』 11년 5월 18일, 『세종실록』 2년 9월 24일 |
『법화경』을 독송하며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교 의식.
개설
법화법석(法華法席)은 칠칠재 또는 백일재 때 100명의 승려가 공덕이 수승하다고 전해지는 『묘법연화경』을 독송(讀誦)하며 망자의 왕생극락을 비는 법석이다. 금으로 경전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이 함께 행해지기도 하였고, 법화법석이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으로 봉행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종의 4재와, 태종의 비(妃)이자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의 백일재에서 설행되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명에 의해 세종초에 수륙재를 제외한 왕실의 모든 법석이 혁파된 이후에는 사찰에서만 법화법석이 설행되었다. 이후 법화법석은 대중들을 위한 공연 형태로 변모해 갔는데, 조선중기 이후 영산대회로 정형화된 뒤 영산재로 발전하였다.
연원
『법화경(法華經)』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말로, 기원전 1세기경 초기 대승불교 시기에 성립된 대승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묘법연화경』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삿다르마푼다리카(Saddharmapundarīka)경』으로 ‘진흙에 물들지 않은 하얀 연꽃과 같은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총 7권 28품으로 구성된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로, 삼승(三乘)이 결국은 일승(一乘)으로 귀일한다는 의미이다.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성문·연각·보살 등에게 각각 맞는 갖가지 법을 설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부처의 지견을 열어 보이고 깨달음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시방불토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의 법만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법화경』의 번역본에는 중국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6년에 한역(漢譯)한 『묘법연화경』과, 진(晉)나라 때 둔황의 승려 축법호(竺法護)가 286년에 한역한 『정법화경』, 그리고 수나라 때의 승려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磨笈多)가 함께 601년에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가운데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이 널리 성행하였으며, 후대의 법화(法華) 사상도 이 번역본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법화경』은 『인왕경(仁王經)』, 『금광명경(金光明經)』과 더불어 대표적인 호국(護國) 경전으로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각종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설행하는 불교 의식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었다.
변천
『법화경』은 그 공덕이 크다고 인식된 까닭에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보급되었으며, 『화엄경』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 신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법화경』 신앙은 신라시대부터 이미 성행하여 『법화경』에 대한 주석서가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공덕을 쌓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경전을 간행하였다. 억불숭유를 정책 기조로 삼은 조선시대에도 신봉되었는데, 1399년(정종 2)에 정천익에 의해 간행된 판본은 현전하는 조선시대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간행 기록이 뚜렷한 것만도 약 120여 종에 이른다.
『법화경』에 근거를 둔 의식으로, 고려시대에는 법화회와 법화도량이 개설되었다. 특히 1282년(고려 충렬왕 8)에 설행된 법화도량은 공주의 구병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종의 4재 법석으로 수강궁의 빈전에서 5일간 법화법석이 행해졌고(『세종실록』 1년 10월 18일), 태종의 넷째 왕자인 성녕대군의 기신에도 법화법석이 설행되었다. 또 원경왕후의 칠칠재 때는 태종의 명에 따라 법석이 시행되지 않았으나, 백일재 때는 대자암에서 법화법석이 7일간 설행되었다(『세종실록』 2년 10월 14일). 1411년(태종 11)에 흥천사에서 법석을 베풀 때는 승려 50명으로 하여금 금자(金字) 『법화경』을 3일 동안 독송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1년 5월 18일).
법화법석이 경전 독송 중심이라면 이와 유사한 법화삼매참법석은 예불 참회가 중심이었다. 망자의 추천(追薦) 의식인 칠칠재 법석에서는 법화·화엄삼매참·능엄·미타·원각·참경 등 주로 참회 경전을 독송하였는데(『세종실록』 2년 9월 24일), 그 중에서도 『법화경』의 비중이 높았다. 또한 조선초에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 또한 『법화경』이었다.
조선전기에는 법화경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왕실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 법화경 간행과 법화법석의 설행은 당시 법화경신앙의 인기를 방증해준다. 법화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 사상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주요한 전통이 되었다. 또한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음신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절차 및 내용
법화법석의 행법은 『작법절차』에 따른다. 먼저 향과 등불, 꽃 등을 올리고 삼귀의를 하고 삼보에게 강림을 청한다. 법석을 열게 된 연유를 아뢰고 관세음보살을 청하여 도량을 청정하게 한 다음 영산교주 석가모니불, 증청묘법(證聽妙法) 다보여래, 극락도사 아미타불, 문수보현대보살, 관음세지대보살, 영산회상(靈山會上) 불보살의 명호를 차례로 거명한다. 이어서 법사는 때에 따라 문장을 지어 아뢰며 개경게송과 진언을 하고, 회주승은 법석의 목적을 풀어 해석한 뒤 함께 예참을 시작한다. 예참이 끝나면 다시 부처를 청하는 유치(由致)와 청사(請詞)를 한 다음 자리를 바치고 공양물을 올린 뒤 바라를 울리며 소문(疏文)을 읽는다. 공양물을 질적·양적으로 변하게 하는 변식의 여러 진언을 염송한 후 향·등불·꽃·과일·차·쌀 등 육법 공양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영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신 석가모니불에게 절을 하고 법석을 끝맺는다.
참고문헌
- 『작법절차(作法節次)』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9.
- 고익진, 「법화경 계환해의 성행내력고」, 『불교학보』12,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75.
- 심효섭, 「조선전기 기신재의 설행과 의례」, 『불교학보』40,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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