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開泰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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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개태사 |
한글표제 | 개태사 |
한자표제 | 開泰寺 |
동의어 | 도광사(道光寺) |
관련어 | 태조왕건(太祖王建), 연산현(連山縣), 강맹경(姜孟卿), 정여립(鄭汝立), 참설(讖說), 계룡산(鷄龍山), 정감록(鄭鑑錄)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충청남도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개태사(開泰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5년 2월 15일, 『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
조선시대에 『정감록』의 배경이 된 곳으로,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천호산(天護山)에 있는 절.
개설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태조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한 기념으로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한 사찰이다. 태조왕건은 이 절이 창건되자 기념 법회인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베풀었고, 직접 소문(疏文)을 지었다. 이 소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개태사발원문」으로 남아 있다. 왕건이 죽고 난 이후에는 초상화를 봉안하는 진전(眞殿)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왕건의 제사를 지냈다. 고려후기에는 이 절에서 강화도 천도 여부를 점치게 했다고 한다.
개태사는 조선 건국 이후부터 점차 쇠락하였고, 조선중기 이후 폐사되었다. 조선시대 도참서인 『정감록』에는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정씨가 개국을 할 때 개태사 터에 도읍지가 들어설 것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 때문에 정여립 모반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개태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천호산(天護山)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의 장자로서 후백제의 왕이었던 신검(神劍)과 싸워 항복을 받고 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 지역의 민심 수습을 위해 연산에 개태사를 세웠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의 개태사는 국가나 사람의 길흉·화복·성패 등을 예언하는 참설(讖說)과 관련하여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1459년(세조 5)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부처, 즉 생불(生佛)이라고 불리는 덕성(德成)이라는 승려가 새벽 2~4시 사이인 사경(四更)에 밝은 빛이 비쳤고, 좌의정강맹경(姜孟卿)의 몸과 똑같은 크기의 별이 나타났다고 하며, ‘강(姜)’자 아래 위의 획을 줄이면 ‘왕(王)’자가 되므로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덕성은 개태사의 승려 가운데 1~2인을 곁에 두면 수고하지 않더라도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강맹경은 이 말을 듣고 즉시 조정에 아뢰어 그에게 말을 전한 별시위(別侍衛)주명녕(周命寧)과 승려 일준(一遵)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세조실록』 5년 2월 15일).
(3) 조선후기
개태사는 선조대에 발발한 기축옥사(己丑獄死)에서도 등장한다. 1589년(선조 22)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 인물들이 피해를 입은 기축옥사가 발생하였다. 당시 황해도관찰사한준(韓準), 재령군수(載寧郡守)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安岳郡守)이축(李軸), 신천군수(信川郡守)한응인(韓應寅) 등은 정여립이 모반하였다는 고발 문서를 조정에 올렸다. 이때 조선 건국 이후 민간에 유포되어 온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서 "연산현 계룡산 개태사 터는 곧 후대에 정씨가 도읍할 곳이다."라고 하였다는 구절을 소개하며, 정여립이 일찍이 승려 의연의 무리와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허가 된 절의 벽에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 / 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하여라 / 무자·기축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 / 태평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라는 시를 썼다는 내용이 보고되었다. 이 기록에서는 개태사 터라고 하여 이미 폐사가 되었지만 비기(秘記)와 연관하여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4) 근현대
조선중기 이후부터 근대까지 개태사는 줄곧 폐사 상태로 있다가 1930년에 김광영이 중건하여 도광사(道光寺)라 하였다. 그 뒤 다시 개태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개태사는 대웅전, 극락전, 팔각정, 요사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태사지석조여래삼존입상(開泰寺址石造如來三尊立像, 보물 제219호)과 개태사철확(開泰寺鐵鑊,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 개태사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과 개태사지석조(開泰寺址石槽,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갑동, 「후백제의 멸망과 개태사」, 『한국사학보』12 , 고려사학회, 2002.
- 양은용, 「고려태조 친제 ‘개태사화엄법회소’의 연구」, 『한국불교문화사상사(상)』(가산 이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가산불교문화진흥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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