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사(慈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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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가 창건한 개경10찰(開京十刹) 중의 하나로 개경에 있던 절.

개설

자운사(慈雲寺)는 태조가 국가의 기도도량으로 창건하였고, 고려후기에 진명(眞明) 국사(國師)혼원(混元)이 이곳에서 왕사로 책봉되었다. 조선초기에 기상이변을 물리치는 소재도량(消災道場)이 개설되었고, 1480년(성종 11) 무렵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태조왕건(王建)은 고려를 건국한 후 수도를 개경으로 정하면서 궁궐과 관아는 물론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다. 그 중에서도 개경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사찰들을 일컬어 개경10찰(開京十刹)이라고 하는데, 법왕사(法王寺)·왕륜사(王輪寺)·내제석원(內帝釋院)·보제사(普濟寺)·지장사(地藏寺)·문수사(文殊寺)·신흥사(新興寺)·사나사(舍那寺)·영통사(靈通寺), 그리고 자운사이다. 태조는 신앙심이 돈독하였고,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불교계, 특히 선사(禪師)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불교가 건국의 밑거름이라고 할 정도였으므로 신왕조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사찰 조성은 중요한 일이었다. 개경10찰 가운데 법왕사와 흥륜사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사격이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10찰이 대부분 국가의 기도도량으로 원찰(願刹)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므로 자운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려후기인 1259년(고려 고종 46) 혼원(混元)이 주석하였다. 혼원은 수선사(修禪社: 현 전라남도 승주군송광사)에서 혜심(慧諶)과 몽여(夢如)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권력자 최우(崔瑀)가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직을 내리고 정혜사(定慧社)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1245년(고려 고종 32) 최우가 강화도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개최할 때 그에게 법회의 책임자인 주맹(主盟)을 맡겼다. 1252년 수선사의 제4세 사주(社主)로 임명받아 그 때부터 수선사에서 선풍(禪風)을 떨쳤는데, 1259년 고종(高宗)이 자운사에 머물게 하였다. 5월 11일 왕사(王師)로 책봉하면서 고종은 스승의 예를 친히 행하려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하지 못했다. 1271년(고려 원종 12) 왕사가 입적하자 왕이 국사(國師)로 추증하여 시호는 진명국사(眞明國師), 탑호는 보광(普光)이라 하였다. 당시의 문신 김구(金坵)가 국사의 비문, 「와룡산자운사왕사증시진명국사비명(臥龍山慈雲寺王師贈諡眞明國師碑銘)」을 찬하였다. 절은 수도 중심에 있어서 때로는 관리들의 회합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고려후기의 문신 이혼(李混) 등이 절에서 원과의 외교 관계를 의논하였다. 1300년(고려 충렬왕 26)에는 왕이 절이 행차하여 전경(轉經)하였다.

(2) 조선시대

1394년(태조 3) 세자(世子)를 절에 보내 사대연성법석(四大緣成法席)을 개설하는데 왕이 직접 거둥하였다(『태조실록』 3년 1월 4일). 이 법회는 별의 괴변(怪變)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려는 목적이었다.

이후 절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데 1480년(성종 11) 무렵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 해 5월 28일 성균관 생원 등 406인이 흥덕사(興德寺)의 중건을 중지하고 불교를 배척하라는 상소를 올렸다(『성종실록』 11년 5월 28일). 이 내용에 따르면 자운사의 재목을 헐어 흥덕사를 중건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절은 비어 있었고, 중건에 참여한 승려들이 직접 자운사의 재목을 운반하였다. 상소에 대해 왕은, 흥덕사는 태종이 아끼던 사찰이고, 자운사의 재목을 옮기는 일은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므로 국가에 폐단이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영태, 「고려 태조의 개경십찰 창건과 그 사상성」, 『불교사상사론』, 민족사, 1992.
  • 이기운, 「고려 개경 사찰 설립 의의와 신행」, 『국제고려학회논문집』8, 국제고려학회, 2006.
  • 한기문. 「고려 태조의 불교정책 : 창건 사원을 중심으로」, 『대구사학』22, 대구사학회, 1983.
  • 황인규, 「수선사 16국사의 위상과 추념-송광사 승보종찰 설정과 관련하여 시고함」, 『보조사상』34, 보조사상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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