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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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와 조선시대에 왕의 후계자인 왕세자를 가리키는 말.

개설

삼국시대에는 왕의 후계자를 중국과 마찬가지로 태자 또는 동궁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경우 황제의 아들들 중에서 황제를 계승할 큰아들을 황태자(皇太子)라 하고 그 이외의 아들들은 친왕(親王)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황제의 큰아들을 다른 아들과 구별하고 동시에 우대하기 위해서였다. 황태자는 줄여서 태자라고도 하였으며, 동궁 또는 춘궁이라고도 하였다. 동궁은 태자가 동쪽에 위치한 궁에 거처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동쪽 방향이 오행상으로 봄에 해당하였기 춘궁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고려시대에는 내부적으로 왕의 계승자를 왕태자(王太子)에 책봉하였고 줄여서 태자라고 하였으며 동궁 또는 춘궁이라고도 하였다. 반면 중국에서 고려의 왕태자 또는 태자를 지칭할 때는 세자(世子)라고 하였는데, 세자란 제후국 왕의 계승자를 황태자와 구별하기 위해 쓰는 용어였다. 예컨대 『예기』의 ‘문왕세자(文王世子)’라는 편명은 제후왕인 문왕이 세자였을 때의 일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국에서 고려의 왕위 계승자를 세자라고 지칭한 이유는 물론 고려를 제후국으로 간주한다는 뜻이었다.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의 왕위 계승자는 내부적으로도 더 이상 왕태자 또는 태자라 하지 않고 그냥 세자라고 하였다. 이런 관행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왕의 계승자는 세자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경칭은 ‘저하(邸下)’였다. 조선시대에 왕의 후계자는 공식적으로 ‘왕세자(王世子) 저하’에 책봉되었다. 반면 왕세자 이외의 왕의 아들들은 적자(嫡子)는 대군(大君)에 서자(庶子)는 군(君)에 책봉됨으로써 왕세자와 차별되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 직후에는 세자의 별칭으로서 동궁 또는 춘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궁 또는 춘궁이란 황태자의 별칭이므로 제후국 체제를 자처한 조선시대에는 참람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었다. 이에 세종은 1434년(세종 16) 4월 8일에 차후로 동궁은 세자로 부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세자의 이칭으로서 동궁 또는 춘궁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내내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세자란 대를 이을 아들이란 뜻으로서 왕위 세습제의 결과물이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왕위 세습제는 적장자(嫡長子) 계승이 원칙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사람들도 세대를 이어 살아가기 때문에 적장자 계승이 자연의 섭리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대나무의 본줄기를 이루는 마디마디는 인간의 적장자와 같고 대나무의 곁가지는 둘째 이하의 여러 자식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대나무가 튼튼한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본줄기를 이루는 각각의 마디가 굳건하고 곁가지가 가늘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사회의 경우에도 적장자가 대를 잇고 그 이외의 자식들은 적장자를 돕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여겼다.

적장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방법은 군주제도에서 큰 장점이었다. 무엇보다도 후계자가 선천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왕자들이 서로 암암리에 후계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큰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미리 후계자 교육을 시킴으로써 충실한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적장자가 무능력하거나 적장자보다도 둘째나 셋째 아들이 유능한 경우, 정국은 늘 쿠데타의 가능성으로 불안했다.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상황도 적장자 상속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본래 적장자 계승의 원칙은 본부인이 아들을 낳는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한 명의 자녀도 생산하지 못한 왕비가 적지 않았다. 이런 경우 왕의 임종 직전까지도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왕의 사후에 대비가 다음 왕을 지명하기도 했다. 또한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 후궁들이 여러 아들을 생산한 경우도 정치 불안을 가중시켰다. 후궁의 아들 중에서 누가 세자가 될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곤 했다.

조선시대에 왕의 후계자는 공식적으로 세자책봉례(世子冊封禮)를 거침으로써 후계자로 인정되었다. 세자책봉례란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장을 수여하는 의식이고, 이때의 임명서를 죽책문(竹冊文)이라고 하였다. 세자책봉례는 대궐의 정전에서 거행되었다. 문무백관과 종친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따라 문신은 동쪽, 무신은 서쪽에 쭉 늘어섰다.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왕은 세자에게 죽책문, 교명문(敎命文), 세자인(世子印)을 전해 주었다. 죽책문은 세자 임명장이고 교명문은 세자에게 당부하는 훈계문이며 세자인은 세자를 상징하는 도장이었는데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졌다. 세자에 책봉된 후에는 중국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에 행차하여 공자의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다.

조선시대 세자는 보통 8세를 전후하여 책봉되었다. 이유는 세자가 되면 ‘시선(視膳), 문안(問安), 입학(入學)’과 같은 복잡한 예를 거행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란 왕이나 왕비가 들 수라를 살펴보는 것이며, 문안은 아침저녁으로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곧 세자가 되면 왕이나 왕비보다 먼저 일어나 수라상을 살펴보아야 하고 문안 인사도 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8세는 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8세 전후로 세자에 책봉했던 것이다. 세자의 입학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의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요청하는 의식으로서 ‘성균관입학의(成均館入學儀)’라고도 했다. 다만 세자는 성균관에서 입학 의식만 치르고 실제 공부는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이 가르쳤다.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입학 의식을 행한 최초의 세자는 훗날의 양녕대군이었다. 이후 세자의 입학식은 점점 자세하게 정비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릴 정도로 중요한 국가 전례로 자리 잡았다. 세자의 입학식은 조선에서의 유교의 위치 그리고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세자의 입학식이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인들에 대한 제사 그리고 성균관 박사에게 가르침을 요청하는 의식의 두 가지 절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제사는 성균관의 대성전에서 이루어졌고, 가르침을 요청하는 의식은 성균관의 학당에서 거행되었다.

장차 조선의 왕이 될 세자가 대성전에서 유교 성인들에게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교가 조선의 국시임을 상징하는 행사였다. 아울러 세자가 학당에서 성균관 박사에게 가르침을 요청하는 의식은 당시 스승에 대한 예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세자에 책봉되면 곧바로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배우자를 골라 혼례를 치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유교의 성인식인 관례는 15~20세 사이에 치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세자는 이를 무시하고 책봉 직후에 치렀다. 이는 세자에 책봉된다는 사실 자체가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관례는 어른의 표시로 모자인 관(冠)과 성인 복장을 착용하게 하고 두 글자의 자(字)를 지어주는 의식이었다. 본래 관례는 자신의 집에서 치르는 것이지만, 세자의 관례는 나이 많은 종친의 집을 빌려 거행하였다. 대궐 정전에서 관례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례 의식을 행하는 주례는 보통 세자시강원의 관리가 맡았다.

관례 이후에 세자는 세자빈을 맞이하는 혼례를 치렀다. 세자빈은 장차 왕비가 될 사람이므로 왕비의 간택처럼 삼간택을 하였고, 선발된 후에는 세자와 마찬가지로 임명장을 받았다. 세자는 세자빈 이외에 공식적으로 후궁도 둘 수 있었다. 세자의 후궁에는 종2품의 양제(良娣), 종3품의 양원(良媛), 종4품의 승휘(承徽), 종5품의 소훈(昭訓)이 있었다.

왕의 후계자로 결정된 세자는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의 내용을 모범으로 하는 하루 일과를 수행하였다. 그것이 곧 ‘시선’, ‘문안’ 그리고 서연(書筵)이었다. 세자가 시선, 문안, 서연에 충실하지 않거나 자신의 주제를 넘어서면 곧바로 폐세자의 위기에 직면했다. 세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의관을 정제하고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시선을 행하였는데, 이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문안 인사와 시선을 행한 후에는 하루 종일 서연에 전념하였고 그 밖에 말타기, 활쏘기, 붓글씨 등 이른바 육예(六藝)를 연마하였다. 서연 중에서 아침의 서연을 조강(朝講)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이 지도하였다. 조강 이후에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낮 공부인 주강(晝講)과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을 이어서 하였다. 석강 이후에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왕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것이 세자의 일상적인 하루 일과였다. 세자는 혹시 부왕이 중병에 들거나 전쟁 등의 사태가 발생하면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 제후국 체제에 맞추어 왕의 후계자를 ‘세자 저하’로 부르던 관행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을 계기로 ‘왕태자 전하’로 호칭이 바뀌었다. 갑오개혁은 일제의 영향력 아래에서 추진되었는데, 당시 일본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는 고종에게 황제에 즉위할 것은 물론 연호의 사용과 단발(斷髮)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대조규개는 조선의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의도였다.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기를 거부하고 타협안으로 황제 대신 ‘대군주(大君主)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대군주’는 제후국의 통치권자인 반면 ‘폐하’는 황제의 경칭이었으므로 이는 제후국 체제와 황제 체제가 혼합된 형태였다. 이에 따라 제후국 체제에 맞추어 ‘세자 저하’로 불리던 것이 ‘왕태자 전하’로 바뀌게 되었다. ‘왕세자빈 저하’는 ‘왕태자비 전하’로 바뀌었다.

이어서 1897년에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왕태자 전하’는 ‘황태자 전하’로 ‘왕태자비 전하’는 ‘황태자비 전하’로 바뀌어 명실상부하게 황제 체제에 적합한 황제의 후계자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후 고종과 순종이 일본 천황의 먼 친척인 ‘왕(王)’으로 격하되면서 황태자의 명칭 역시 ‘왕세자’로 격하되었다가 해방 이후 공화정이 성립되고 군주제도가 사라지면서 세자 역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

조선시대의 세자는 제후국 체제에 맞게 정비된 조선시대 세습 군주제도의 산물로서 세자의 책봉, 일과, 학업 등을 통해 조선시대 문치 제도 및 유교 통치 문화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2003.
  • 신명호,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신명호, 『조선왕실의 자녀교육법』, 시공사, 2005.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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