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書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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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초에 왕세자의 교육을 관장한 관아.

② 조선시대에 왕세자를 위한 교육제도.

개설

① 서연은 태종초에 태조 초에 설치한 세자관속이 개칭되면서 성립되었고, 세조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으로 개칭될 때까지 세자에게 경사를 교육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서연에 소속된 관직에는 겸관인 세자사·부(世子師·傅) 이하와 녹관인 좌·우보덕(左·右輔德) 이하가 있었다.

② 조선시대에 차기 왕인 왕세자에게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를 가르쳐 익히게 하였던 교육제도를 말한다. 서연은 태조 때에는 세자관속(世子官屬)에서, 태종 때에는 서연에서, 세종 때에는 집현전에서 담당하였고, 세조 이후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담당하였다. 서연의 관원인 서연관에는 학문이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한 사람이 제수되었다. 서연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사서오경이 중심이 되었으나 세자의 나이가 어릴 때에는 『소학』이나 『효경』 등을 익혔다.

내용 및 특징

① 서연은 설치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1404년(태종 4) 8월에 원자 제(禔)를 왕세자에 책봉하고 세자부(世子府)로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했으며, 1405년 3월에 육조를 정3품아문에서 정2품아문으로 격상하고 정책·서무 분장관아로 삼으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육조 속사(屬司)·속아문(屬衙門)제를 정비하였는데 예조속아문에 서연이 명기되었다. 이점에서 서연은 1404년 8월로부터 1405년 3월의 어느 시기에 태조 초에 설치된 세자관속이 개칭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 서연에 소속된 관직에 있어서도 세자관속이 설치될 때에는 정2품관이 겸하는 좌·우사(左·右師)로부터 정8품관이 겸하는 좌·우시직(左·右侍直)까지의 16 겸직이 있었고, 이후 1395년에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 1401년에 사(師)가 신치되었다. 서연이 설치된 이후의 태종대에는 세자사·부(世子師·傅) 이하로부터 세자좌·우정자(世子左·右正字)까지가 확인되었으며, 1431년(세종 13) 11월에 세자좌·우보덕(世子左·右輔德)이하 10직이 겸직에서 녹직(祿職)으로 전환되고 정8품직의 겸직이었던 좌·우시직이 개칭된 좌·우부정자(左·右副正字)가 혁거었다. 이점에서 서연에 소속된 관직은 1431년까지는 세자사로부터 좌·우시직까지의 겸관이 있었고, 1431년 이후에는 세자사 이하로부터 우부빈객까지의 겸관과 좌·우보덕으로부터 좌·우정자까지의 녹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연의 관아지위는 1405년 예조속아문 명기 때에 경연과 성균관(成均館)의 중간이었음에서 정3품 당상아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서연은 경연과 마찬가지로 조강·주강·석강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세 차례 시행되었다. 조강은 해가 뜰 무렵인 평명(平明)에, 주강은 정오 무렵에, 석강은 오후 2시 무렵에 하였다. 이 밖에 비정규 강의로써 필요한 경우 시강관을 불러서 공부하는 소대(召對)야대(夜對)가 있었다.

서연을 담당한 관리들은 당상관의 경우 다른 관직을 가진 겸관(兼官)이었고, 당하관은 서연의 강의만을 전담하는 녹관(祿官)이었다. 서연관은 정1품의 사(師)·부(傅)와 종1품인 이사(貳師)는 세자의 교육을 감독하였고, 정2품인 좌·우 빈객(賓客)과 종2품인 좌·우 부빈객(副賓客)은 강의를 담당하였다. 당하관인 보덕(輔德, 종3품)·필선(弼善: 정4품)·문학(文學, 정5품)·사서(司書, 정6품)·설서(說書: 정7품) 등은 강의를 전담하였다. 대체로 서연관은 학문이 뛰어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 가운데 적임자를 선택하였다. 서연관은 세자를 가까이하였으므로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강의에 사용하는 교재는 주로 유교의 경전과 사서였다. 경서로는 사서오경이 주로 사용되었고, 사서로는 『통감(通鑑)』과 『강목(綱目)』 등이 사용되었다. 세자의 나이가 어릴 때에는 기초적인 서적인 『천자문』·『소학』·『효경』 등을 공부하였다. 법강에 해당하는 조강·주강·석강에서는 경서가, 소대나 야대에서는 사서가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연의 강의 방식은 조강의 경우 빈객 1명, 궁관(宮官) 상·하번 각 1명, 세자익위사(世孫翊衛司) 1명, 사헌부 1명, 사간원 1명이 참여하였는데, 자리를 갖추어 정한 뒤에 먼저 세자가 전날 수업한 것을 먼저 암송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암송하기 이전에 먼저 책을 보면서 음(音)을 한 번 읽고, 뜻풀이도 한 번 하였다. 이후 강관이 새로 배우는 부분을 읽으면 왕세자도 따라 읽고 다시 뜻을 풀이하면 왕세자도 따라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주강과 석강도 강의 방식은 비슷하지만, 세자가 어릴 때에는 조강에서 배운 부분을 복습하기도 하였다.

강의는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대개 쉬었으며, 제사나 종묘·사직의 대제(大祭), 왕의 생일 등 기타 공식 행사가 있는 경우에도 휴강하였다.

변천

① 1405년에 예조속아문으로 정착된 서연이 세자시강원으로 개칭된 시기는 명확하지 못하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의 관직관계 기사를 보면 1405년으로부터 1467년(세조 13) 7월까지는 세자사 이하 세자우정자까지의 여러 관직들이 확인되고, 1467년(세조 13) 11월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부(傅)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이사(貳師)의 관직이 확인된다. 한편 이보다 앞선 1466년 1월에는 『경국대전』의 편찬과 관련되어 대대적인 관제정비가 있었는데, 이 때는 서연이나 세자시강원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점에서 서연은 『경국대전』편찬과 관련되어 1467년 7월로부터 11월까지의 어느 시기에 세자시강원으로 개칭되면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② 조선 초 태조 때에는 세자관속을 설치하여 여기에서 세자의 강학(講學)과 보호를 담당하게 하였다. 태종초에는 성균관에 원자(元子)를 입학시키고 겸직이었던 원자좌·우유선(元子左右諭善)들로 하여금 서연을 전담하게 하였다. 이어 1404년 원자가 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세자사로부터 세자정자까지의 서연관 직제가 정비되면서 이들 이 서연을 담당하였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관이 경연관과 서연관을 겸임하고 경연과 서연을 전담함에 따라 서연관을 겸대한 집현전관이 서연을 전담하였다(『세종실록』3년 10월 26일). 세조말에는 서연이 예조소속의 종3품아문 세자시강원으로 바뀌고 영의정이 겸하는 사 이하의 겸관과 전임관인 보덕·필선·문학·사서·설서가 편제되어 서연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 세자시강원 관원이 서연을 전담하는 체제가 조선말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연관에 산림출신관인이 제수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經國大典』
  • 『大典會通』
  • 이석규, 「조선 초기 서연 연구」, 『역사학보』110, 1986.
  • 정재훈, 「세종의 왕자 교육」, 『한국사상과 문화』31, 2005.
  • 지두환, 「조선 후기 서연관 제도의 변천」, 『한국학논총』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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