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객(賓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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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 소속의 정2품 겸임 관직.

개설

전통시대 세자의 교육 및 보도(輔導)를 담당하기 위한 관청 및 관직은 신라 경덕왕 때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이 고려시대의 동궁관으로 이어져, 태자의 교육과 관련한 각종 관직명이 등장하게 되었다. 빈객(賓客)의 경우 『고려사』 「백관지」 ‘동궁관’에 따르면 1068년(고려 문종 22)에 정3품의 빈객 4명을 두었으며, 1116년(고려 예종 11)에도 태자의 관속으로 정3품의 빈객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새로운 관제가 반포될 때 빈객의 직제가 마련되었다. 당시 세자의 강학(講學)과 시위(侍衛)를 위해 세자관속(世子官屬)이 설치되었다. 세자관속으로 정2품의 좌사(左師)와 우사(右師)가 각 1명, 종2품의 좌빈객(左賓客)과 우빈객(右賓客)이 각 1명, 종3품의 좌보덕(左輔德)과 우보덕(右輔德)이 각 1명, 정4품의 좌필선(左弼善)과 우필선(右弼善)이 각 1명, 정5품의 좌문학(左文學)과 우문학(右文學)이 각 1명, 정6품의 좌사경(左司經)과 우사경(右司經)이 각 1명, 정7품의 좌정자(左正字)와 우정자(右正字)가 각 1명, 정8품의 좌시직(左侍直)과 우시직(右侍直)이 각 1명 배치되었다.

1395년 5월에 부빈객(副賓客)이 설치되었는데, 당시 부빈객의 품계가 무엇이었는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경국대전』에는 종2품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1395년에 부빈객이 설치될 때 빈객은 정2품 관직으로 격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세자관속이 세자시강원으로 개편되면서 빈객의 직제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빈객은 좌빈객과 우빈객 각 1명이고 품계는 정2품으로 겸관직이었다. 빈객은 고려시대에는 정3품이었다가 조선 건국 직후에는 종2품으로 승격되었고, 후에 다시 정2품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세자의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결과라 할 수 있다.

담당 직무

빈객은 ‘손님’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의 빈객은 정2품의 관료가 겸임하였는데, 정2품은 육조(六曹)의 판서와 같은 고위 관료였다. 따라서 빈객은 비록 세자의 선생님이기는 하지만 손님처럼 예의를 갖추어 대우해야 할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빈객은 상위직인 사·부와 함께 서연에 참석하는데 조강(朝講)은 모두 참석하지만 주강·석강은 사·부를 제외하고 빈객·부빈객 중 1명 및 하위직인 궁관이 참석하였다. 또한 매달 두 차례 시행되는 회강(會講)에도 참석하였다.

조선시대의 세자는 장차 왕이 될 신분이므로 세자의 제왕학 교육 목표 역시 세자 개인의 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선까지도 개발·육성하는 데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의 고위 관료를 빈객으로 임명하여 세자의 품성과 학문을 인도하게 함으로써 세자의 선에 대한 학문적 기초와 실천적 토대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변천

1894년(고종 31) 관제 개정 시 시강원이 궁내부에 합속되었는데, 이때 부빈객의 직제는 폐지되고 빈객만 존속하면서 경연(經筵) 학사(學士), 규장각(奎章閣) 학사, 협판(協辦)을 지낸 사람 중에서 겸임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1년 7월 22일).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제 체제가 성립되면서 세자시강원 역시 황제 체제에 맞추어 황태자시강원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세자익위사 역시 황태자익위사로 바뀌었다. 하지만 황태자시강원에 소속된 관원의 명칭이나 지위는 이전과 같았다. 대한제국 멸망 후 황태자시강원은 이왕직(李王職) 서무계(庶務係)에 흡수·통합됨으로써 황태자시강원에 소속된 빈객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학청일기(講學廳日記)』
  • 『시강원지(侍講院志)』
  •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 이기순, 「인조조의 ‘반정공신’ 세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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