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水鐘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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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수종사 |
한글표제 | 수종사 |
한자표제 | 水鐘寺 |
상위어 | 원당(願堂) |
관련어 |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 정혜옹주(貞惠翁主), 세조(世祖), 금성대군(錦城大君), 의빈권씨(懿嬪權氏), 명빈김씨(明嬪金氏), 인목대비(仁穆大妃)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수종사(水鐘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6년 10월 6일, 『단종실록』 1년 6월 26일, 『성종실록』 4년 7월 16일, 『연산군일기』 7년 12월 25일 |
세조가 중창하고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경기도 남양주시운길산에 있는 절.
개설
수종사(水鐘寺)는 세조와 16나한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부도가 있으며 왕실 비빈들이 자주 불사를 일으켰다. 성종대에는 양반 부녀자들이 자주 유숙하여 풍기문란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말기까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중창했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김창협, 정약용 등 문인들이 자주 찾아 시를 읊었던 곳이다.
내용 및 변천
수종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근거 자료가 없어서 자세하지 않다. 다만 수종사 관련 설화 두 가지가 전한다. 첫 번째, 고려 태조왕건이 산 위에서 솟아나는 이상한 구름 기운을 보고 가보았더니 우물 속에 동종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조선 세조는 1458년(세조 4)에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지금의 양수리에서 1박을 하였는데 한밤중에 맑은 종소리가 들려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보니 16나한상(十六羅漢像)이 모셔져 있는 바위굴 속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렸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에 5층의 돌계단을 쌓고 터를 닦아 절을 중창하여 수종사라 이름 짓고, 팔각5층석탑을 건립하여 바위굴에서 발견한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수종사에는 두 개의 중요한 문화재가 있다. 하나는 석조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팔각5층석탑이다. 석조부도는 태종의 다섯째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부도이다. 부도의 옥개석 옆면에 남아 있는 명문에 의하면, 1439년(세종 21)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시주하여 세웠다고 하였다. 정혜옹주의 어머니 의빈권씨(懿嬪權氏) 는 태종이 승하한 후 비구니가 되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세종실록』 6년 10월 6일). 의빈은 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불교 장례법에 따라 화장하였는데 사리가 나와서 금성대군의 시주를 받아 수종사에 부도를 세우고 딸의 사리를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성대군은 어린 시절 의빈권씨에게 길러졌기 때문에 의빈을 친어머니처럼 여겼다(『단종실록』 1년 6월 26일). 그 인연으로 인해 의빈의 딸인 정혜옹주의 부도탑 조성에 시주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종사 팔각5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규모가 작아진 조선초기의 석탑 양식이다. 이 석탑에서 모두 31구의 불상과 묵서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1493년(성종 24)에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김씨(明嬪金氏)가 발원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불상을 조성하여 석탑에 납입한 불상 2구와 1628년(인조 6)에 인목대비의 발원으로 조성한 불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볼 때 수종사는 정업원에 소속되어 왕실 비빈들의 불사가 빈번하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수종사는 성종대에 비구니들과 양반 부녀자들이 자주 가서 유숙하던 곳이었다. 1473년(성종 4)에 대사헌서거정(徐居正)은 양반가 출신 비구니들이 사대부가의 과부들을 꾀어내어 절에서 유숙하고 혜사당(惠社堂)과 정각(正覺) 등은 수종사에서 여러 날을 머물며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엄벌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는 차자(箚子)를 올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종은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하였지만 여승들은 금지하지 않았다며 처벌하지 않았다(『성종실록』 4년 7월 16일).
또 수종사는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연산군대에 수종사는 땔나무를 공급하는 시지(柴地)를 점유하고 있었는데도 왕이 함부로 금지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시지를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수종사에서 시지를 점유하자 왕도 함부로 금지하지 못하고 관리를 보내서 살펴보라고 하였을 뿐이다(『연산군일기』 7년 12월 25일). 이러한 사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왕실 비빈들에게 수종사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종사의 아름다운 풍광은 여러 문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성종대의 서거정은 동방 사찰 가운데 제일의 전망이라고 하였고, 선조대의 임숙영(任叔英), 숙종대의 김창협(金昌協), 영조대의 이병연(李秉淵) 등의 시인들도 수종사의 경관을 시와 수필로 노래하였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은 말년에 고향인 남양주시 마재마을에 머물 때 자주 수종사를 찾아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 시를 읊기도 하고 수필을 쓰기도 했다.
수종사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1890년(고종 27)에 주지 풍계혜일(楓溪慧一)이 황제에게 내탕금 8,000냥을 받아 두 차례 수종사를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후 다시 4,000냥과 금백홍사(錦帛紅絲)를 더 받아 불상 4존(尊)과 탱화 3축(軸)을 새로 봉안하였으며, 대법당·나한전·어향각(御香閣), 그리고 산왕각(山王閣)을 단청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박아연, 「수종사 팔각오층 석탑 봉안 왕실발원 금동불상군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심경호, 「수종사와 조선 후기 문인」, 『국문학연구』2, 국문학회, 199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