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성사(乾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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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개성시송악산(松嶽山)에 있던, 고려 왕실의 원찰.

개설

건성사(乾聖寺)는 921년(고려 태조 4) 태조왕건의 명으로 창건되었으며, 이후 고려 왕실의 원찰(願刹)로 역대 왕들이 자주 행차하여 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1216년(고려 고종 3)에 왕이 행차하여 절의 제석전(帝釋殿)에서 제석재(帝釋齋)를 행하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도 태종이 이 절에 행차하여 제석예참(帝釋禮懺)을 설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건성사는 고려초기 태조왕건의 명으로 창건된 후 조선시대에 절이 없어질 때까지 왕과 왕실에서 자주 행차하여 제석재를 지낸 절이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에서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을 때 강화도에 다시 건성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하여, 고종과 원종이 자주 행차하여 제석재를 지냈다고 한다.

제석(帝釋)은 수명·자손·운명·농업 등을 관장하고 하느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믿어지는 신령으로 ‘삼불(三佛) 제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석은 원래 인드라(Indra)라는 인도 천상신(天上神)의 한어(漢語) 번역이다. 한국에서 제석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 제석을 기원으로 한다. 환인의 한자 표기는 불교의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또는 제석환인(帝釋桓因, Sakra-Devanam Indra)에서 온 것으로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의 할아버지인 한민족의 천신을 ‘환인 제석’이라 표기하였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래, 특히 고대 사회에서 각 나라별로 봄·가을에 모여 크게 천제(天祭)를 올렸다. 삼국시대 중엽 중국으로부터 유교·불교·도교가 들어와 수용되면서 이 천제의 전통은 분화와 변모를 겪게 된다. 유교의 영향으로 종래의 천제는 국가의 제례로 편입되고 의례 형식은 유례화(儒禮化)하였다.

천신 신앙은 이로써 국가 제례로서 유례화한 것과 무당에 의해 주재되는 민간의 천신 신앙으로 분화하였다. 불교가 융성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천신은 제석이라는 불교적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천신 신앙의 전통은 단절된다. 유신들은 유교의 예(禮)에 의거하여 중국의 천자만 천제를 지낼 수 있고, 그 제후국인 조선의 왕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할 뿐이라고 주장하며 왕의 천제 거행을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정치적인 것과는 별도로 불교를 지속적으로 신봉해 제석 신앙의 전통을 이어왔다. 1401년(태종 1)에는 태종이 건성사에서 제석예참을 설행하고 제석신에게 예배하고 죄과를 참회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년 1월 7일). 1403년(태종 3)에도 역시 건성사에서 제석재를 베풀었는데, 왕의 장수를 빌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태종실록』 3년 12월 2일). 집권 초기 태종의 불교 인식과 불교 정책에 비추어 보건대 건성사 행차는 그의 불교 신앙 차원이 아닌 아버지 태조이성계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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