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大藏經)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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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장경 |
한글표제 | 대장경 |
한자표제 | 大藏經 |
동의어 | 일체경(一切經), 장경(藏經), 중경(衆經), 대장(大藏) |
관련어 | 삼장(三藏),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 팔리어대장경(Pali語大藏經), 티베트대장경(티베트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 패엽경(貝葉經)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장경(大藏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5년 12월 25일, 『세종실록』 6년 1월 1일, 『세종실록』 6년 1월 2일, 『세종실록』 6년 1월 8일 |
경·율·논의 삼장을 중심으로 한 불교 전적의 총칭.
개설
대장경(大藏經)은 인도에서 완성된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과 더불어 다른 불교권에서 저술된 논서들을 모두 포함한다. 대장경은 불교가 전파된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까닭에 그 종류도 매우 많지만, 가장 방대한 분량의 대장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다. 현전하는 한국의 고려대장경은 중국 북송관판 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고려 고종 때 판각한 것으로, 완성된 후부터 최근까지 수차례에 걸쳐 인출(印出)되어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상당한 분량이 보관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1) 인도~중국의 대장경
대장경은 불교 전적을 총칭하는 말로 일체경(一切經), 장경(藏經), 중경(衆經), 대장(大藏) 등이라고도 한다. 대장경은 인도에서 편찬된 경전만이 아니라, 중국에서 저술된 위서(僞書)나 주석서 목록까지도 포함한다. 현존하는 대장경으로는 팔리어대장경, 산스크리트어[梵語]대장경, 한역(漢譯)대장경, 티베트대장경, 몽고어대장경, 만주어대장경 등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팔리어대장경, 티베트대장경, 한역대장경이다.
팔리어대장경은 고대 인도어인 팔리(Pali)어로 쓰인 것으로 여러 종의 대장경 중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초기 불교의 성전으로 부처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집대성한 경장(經藏), 계율을 집대성한 율장(律藏), 후세의 학승들이 연구한 논장(論藏) 등을 포함하고 있다. 경장은 장부(長部), 중부(中部), 상응부(相應部), 증지부(增支部), 소부(小部) 등의 5부로 구성되어 있고, 율장은 경분별(經分別), 건도부(健度部), 부수(付隨)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논장은 법취론(法聚論), 분별론(分別論), 인시설론(人施設論), 논사(論事), 계설론(界說論), 쌍대론(雙對論), 발취론(發趣論) 등의 7론이 유명하다. 대승경전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팔리어 삼장은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 남방 국가에 전해졌고, 경전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와 내용을 유지하고 있어서 초기 불교 연구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팔리어대장경은 19세기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이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1936~1942년)을 간행했다.
티베트대장경은 티베트어로 번역된 불전으로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이라고도 한 다. 7세기경 산스크리트어에 기초하여 티베트어 문자와 문법을 창안한 후 8,9세기에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티베트어로 번역하는 대규모의 역경 사업이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티베트대장경은 경장·율장에 해당하는 칸귤(불설부)과 논장에 해당하는 텐귤(논서부)로 양분되어 있고, 수록되어 있는 경전의 수가 4,500부에 달한다. 중국에서는 1410년 최초의 티베트대장경인 명나라 영락판(永樂板)이 완성되었고 이어서 만력판(萬曆板)과 청나라 강희판(康熙板) 곧 북경판(北京板)이 등장했다. 국내에는 1967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기증한 라싸판을 비롯해 북경판과 데르게판 등 4가지 판본이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티베트대장경은 충실한 직역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복원은 물론 불교 연구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한역대장경은 한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2세기 이래 1,000여 년에 걸쳐 수많은 번역자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수록하고 있고 그 내용은 초기 불교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는 경·율·논을 포함하고 있다. 번역 연대에 따라 고역(古譯), 구역(舊譯), 신역(新譯) 세 가지로 구별한다. 고역이란 구마라집(鳩摩羅什) 이전에 이루어진 번역으로 후한, 삼국, 서진시대의 번역을 가리킨다. 구역이란 구마라집에서 현장(玄奘) 이전까지의 번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7세기 현장 이후의 번역을 신역이라고 한다.
(2) 고려대장경
한역대장경 중 최초 간행본은 북송 때의 북송관판(北宋官板) 또는 촉판(蜀板) 대장경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원, 명, 청의 각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대장경 간행이 있었지만, 북송관판 대장경이 990년(고려 성종 9) 고려에 전해져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간행되었다.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1011년(고려 현종 2)경부터 판각을 시작하여 1087년(고려 선종 4)에 일단락된 것으로 본다. 초조대장경 경판은 여주 흥왕사의 대장전(大藏殿)에 한동안 보관되었다가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符仁寺)로 옮겨졌다.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호국의 의지를 담아 대규모 작업을 다시 시도한 것이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의 판각이다. 비록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소실되었지만 그 인쇄본을 국내 박물관과 개인 등이 약 300여 권을 갖고 있음이 밝혀졌고, 일본의 교토 남선사(南禪寺)와 쓰시마섬에 상당량의 초조대장경이 보존되고 있어서 약 2,000여 권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왕실은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침입을 받고 다음 해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장경 조판을 위해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1236년(고려 고종 23)에 판각을 시작해 1251년에 마쳤다. 경판은 강화 대장도감과 남해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나누어 판각하였다. 판각의 규모는 1,547부 6,547권이고 조선시대에 추가된 것을 합치면 1,562부 6,783권이며, 경판의 수는 81,258판에 이른다. 경판은 처음 강화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보관되었지만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조선 태조 때 한양지천사(支天寺)를 거쳐 합천해인사(海印寺)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목판대장경으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대장경판이 완성된 후 대장경 인출은 매우 빈번했다. 1251년 대장경판 경축회향식 때 대장경을 인출하기 시작했는데, 1381년 이색(李穡)은 아버지 이곡(李穀)을 위해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여주신륵사(神勒寺)에 봉안하고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를 남겼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최근 1968년까지 13회에 걸친 인출 기록이 전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고려대장경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 대장경 인출본의 상당 분량이 일본에 반출되었다.
(3) 조선시대의 대장경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은 조선 조정에 꾸준히 대장경을 요구해 왔다.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일본이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하사해 달라고 요청한 일이 80여 회에 이르며, 그 결과 많은 대장경이 일본에 전해졌다. 1414년(태종 14) 신륵사에 봉안된 대장경 1부 전체가 일본 사신을 통해 반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일본 내에 남아 있는 고려대장경 간행본이 윤왕사(輪王寺) 6,114책, 증상사(增上寺) 1,259책, 건인사(建仁寺) 약 100첩, 금강봉사(金剛峯寺) 6,285첩, 길비진신사(吉備津神寺) 994권, 법연사(法然寺) 2,000여 첩, 대마관음당(對馬觀音堂) 약 950책 5,000권 등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23년(세종 5) 12월 일본 사신인 규주(圭籌)와 범령(梵齡) 등 135명이 대궐에 들어와 토산품을 바치며 일본 국왕의 요청이라고 하면서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大藏經板) 전체를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세종은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이라고 하며 일본 사신들의 요청에 응해 주고자 하는 생각도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 의견을 접한 후 대장경판은 조선에도 1본(本)밖에 없기 때문에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대신 밀교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주화엄경판(註華嚴經板), 대장경 1부를 주겠다고 하며 그들을 타일렀다(『세종실록』 5년 12월 25일). 이에 일본 사신들은 다시 예조(禮曹)와 지신사(知申事) 등에게 반드시 대장경판을 받아 일본 본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의 글을 올렸다(『세종실록』 6년 1월 1일). 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당하자 급기야 단식투쟁을 하며 경판을 요구하는 집단행동을 벌이기까지 했다(『세종실록』 6년 1월 2일). 이에 세종은 일본 사신들에게 경판을 얻고 못 얻는 일은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처음 약속한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 대장경 1부에다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 1부를 더해 주고서 일을 마무리지었다(『세종실록』 6년 1월 8일). 일본의 고려대장경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참고문헌
- 미즈노 고겐 지음, 이미령 옮김, 『경전의 성립과 전개』, 시공사, 1996.
- 이지관 편, 『가산불교대사림』,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