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역승(監役僧)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에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된 승려를 관리 감독한 승려.

개설

감역승(監役僧)은 궁궐과 관청의 건축 및 수리 등을 감독하기 위해 임시로 두었던 감역관(監役官)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 승려이다. 조선전기에는 왕과 왕실의 주도로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감역승을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내용

조선전기에는 왕명으로 관청이나 사찰을 중건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공사는 동원된 인원과 물자가 대규모여서, 이를 관리 감독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일반 토목 공사와 달리 승려들을 동원하는 경우에는 이들을 관리할 만한 승려가 감독하는 것이 적합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감역승을 임명하여 공사를 관할하게 하였다.

예컨대 1468년(세조 14)에 세조는 학열(學悅)을 감역승으로 삼아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洛山寺)를 중창하게 하였다. 학열은 세조와 예종 등의 후원을 받아 진관사(津寬寺)·대자사(大慈寺)·봉선사(奉先寺) 등을 중건하기도 했다. 또 1484년(성종 15)에 덕종의 후궁이었던 귀인권씨의 부탁을 받은 성종은 학조(學祖)를 감역승으로 임명하고 안암사(安巖寺) 중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안암사의 중창은 조정 신료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성종은 귀인권씨의 청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창 공사를 그대로 추진하였다(『성종실록』 15년 2월 24일). 당시 안암사의 감역승이었던 학조가 병들자, 성종은 왕실의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5년 2월 26일).

한편 1469년(예종 1)에는 강원도 보안현의 찰방(察訪)김종(金鍾)이 역리(驛吏)신의징(申義澄) 등의 보고를 근거로, 낙산사의 감역승인 학열 등이 강제로 역마(驛馬)를 징발하여 함부로 사용한다고 지적하며 그 시정을 요구하였다. 예종이 환관을 보내 자초지종을 묻자, 학열은 낙산사 감역승 양수(良遂)·의심(義心)·숭덕(崇德) 등과 함께 역마를 타고 상원사(上院寺)에 이르러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었고, 뒤에 낙산사에 이르러 숭덕 등으로 하여금 안동 관(官)의 종(鍾)을 운반하게 하였으니, 이는 함부로 역마를 징발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였다. 이에 예종은 학열과 감역승들을 무고한 죄로 김종을 참형에 처하였다(『예종실록』 1년 윤2월 25일).

안암사와 낙산사의 중창을 둘러싼 논란은 조선전기 유학자 관료들과 불교계의 영향력 있는 승려들 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안암사는 성종의 후궁 귀인권씨의 원당이었고, 낙산사는 예종의 원당(願堂)이었기 때문에 두 사찰의 감역승 또한 왕실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왕실의 불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조정의 관료들은 감역승들에 대한 비난을 통해 왕실의 불사 행위를 막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 안계현, 『한국불교사연구』, 동화출판공사, 1982.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