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驛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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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의 전달이나 사신과 지방관의 왕래를 위해 전국의 각 역(驛)에 비치한 교통 및 운송용 마필(馬匹).

개설

교통로를 따라 역참(驛站)을 두는 제도가 삼국시대에 이미 정비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마도 이 시기 주요 역에 비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역마의 운용에 대한 제도가 구체적으로 정비된 것은 대체로 고려시대 이후로 보인다. 역마 지급이 이루어진 것은 고려후기 원종대인 1274년(고려 원종 15) 포마법(鋪馬法)이 제정되어 각 도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관원의 역마 이용 규정이 명문화되면서부터였다. 1276년(고려 충렬왕 2)에 포마차자색(鋪馬箚子色)을 설치하여 공문 전송 이외에 역마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역마 이용 증서인 차자(箚子)를 발급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역마의 확보와 이용에 대한 규정이 크게 정비되었다. 역마는 역에 있어서 중요한 교통 통신 수단이었으므로 이의 확보와 관리는 매우 중요하였다. 역마는 군사정보나 왕명 및 공문서의 전달, 그리고 사신의 왕래에 따른 복물(卜物)의 운송과 진상, 공부(貢賦) 등의 물자를 운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1392년(태조 1) 9월 포마법(鋪馬法)이 개정되었으며(『태조실록』 1년 9월 21일), 1410년(태종 10) 4월에는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을 제정하고 마패도 개조하여 역마 이용에 통제를 가하였다(『태종실록』 10년 4월 5일). 15세기 후반 제정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명을 받들고 다니는 사신은 병조에서 등급에 따라 증서인 마문(馬文)을 지급하면 병조에서 마패를 발급받고 이에 따라 역마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관원들에게는 관품에 따라 대군(大君), 의정(議政)은 7필, 종사관 이하는 2필씩 지급하고 지방 수령의 경우에는 도호부 이상은 20필, 군 이하는 15필씩 지급하게 되었다.

형태 및 생태

역마는 역로의 크기에 따라 상, 중, 하등의 3등급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역의 대소에 의하여 배치하였는데 역에 배치된 역마의 종류는 그 빛깔에 따라 여러 가지였다. 즉 검은 갈기의 누런 말인 고라(古羅), 푸른 털과 흰 털이 뒤섞인 흰말인 청총(靑驄) 등이 그것이다.

역마를 보충하는 방법은 주로 관마(官馬) 즉 목장마를 분급하는 것이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먼저 역호(驛戶)에 의한 입마역(立馬役)을 통한 방법이다. 역리나 역졸 또는 관군(館軍)을 역호로 편성하여 신역의 하나로써 입마역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역호의 고역으로 인하여 도망과 말 값의 앙등으로 역마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목장마를 분급해준다거나 마호를 새롭게 편성하여 입마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마호입마역(馬戶立馬役)이라 하여 마위전을 경작하는 대가로 1인 1필 또는 공동으로 역마를 사육하여 입대하게 하였다. 셋째로 역마고립제(役馬雇立制)라고 하여 다른 역에서 역마를 보충하거나 말 값을 돈을 주고 민간에서 구입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역호(驛戶)에서 역마를 확보하였으나 점차 마호입역제 또는 역마고립제 등의 다양한 방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전근대 한국의 말은 생태적으로 볼 때 최초에는 과하마(果下馬)와 같은 작은 말이 재래종 말이었지만 중국의 북부 지방이나 몽골 등 다른 지역에서 전래된 큰 말들이 전해지면서 이전보다 다소 체격이 큰 중형마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몽골의 영향이 컸던 고려후기에는 몽골 계통의 말이 적지 않게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초기 중국 명나라가 군사적 목적에서 전마를 요구함에 따라 조선의 우수한 많은 말들이 공마(貢馬) 등으로 중국에 보내져 당시 조선의 역마의 경우 다소 종자가 작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중국에서 이른바 호마(胡馬)라 불리는 큰 체격의 우수한 말들이 조선에 다량으로 수입되어 기존의 조선 말과의 교배로 우수한 전마들이 다수 생산되었으므로 역마의 품질도 우수해지기도 하였다.

역사적 관련 사항

『만기요람』에 따르면 전국에 모두 5,380필의 역마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1640년(인조 18)에 파악된 3,274필에 비하면 상당히 증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평안도 지역의 경우 18세기 무렵 각 역별로 13개 역에 모두 214필의 역마가 배정되어 있었다. 경상도의 경우 금산의 김천역에서 지례의 작잉역까지 20개 역에 172필로 평균 8필씩 배치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의 경우 주요한 역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각 역별로 10여 필 정도 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마의 경우 시대에 따라 다소의 증감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에서 각 역별 역마 지급의 규정을 명시하지 않아 역마에 대한 폐단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에 17세기 중엽의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역마의 정액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각 역을 대, 중, 소로에 따라 9등로로 나누어 1등로는 36필, 2등로는 32필, 3등로는 28필, 4등로는 24필, 5등로는 20필, 6등로는 16필, 7등로는 12필, 8등로는 8필, 9등로는 4필씩 배정하여 지급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역마를 타는 관원의 수종군(隨從軍)인 구종(丘從), 서자(書者), 마두(馬頭), 보종(步從) 등도 정액화하여 2품 이상은 10명, 당상관은 8명, 6품 이상은 6명, 9품 이상은 4명, 관직이 없는 무직인(無職人)은 1명씩 차등 있게 지급할 것을 주장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여지도서(輿地圖書)』
  • 『반계수록(磻溪隨錄)』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9.
  • 조병로, 『한국역제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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