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승(胡僧)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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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호승 |
한글표제 | 호승 |
한자표제 | 胡僧 |
동의어 | 인도승(印度僧), 서역승(西域僧) |
관련어 | 마라난타(摩羅難陀), 묵호자(墨胡子), 아도화상(阿道和尙), 이차돈(異次頓), 모례(毛禮), 지공(指空), 대도(大都)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삼국~조선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호승(胡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39년 8월 15일 |
인도 또는 서역(西域)의 승려를 일컫는 말.
개설
한국불교사에서 호승(胡僧)의 존재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백제불교와 신라불교는 호승 마라난타와 묵호자의 불교 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신라의 경우 6세기 이차돈의 순교에 의한 불교 공인 전에 묵호자의 포교가 선행되었다. 또한 14세기 원나라대도에 주석하였던 지공은 고려의 나옹혜근을 비롯한 여러 선승에게 선법을 전함으로써 여말의 선불교에 큰 영향을 준 호승이었다.
내용 및 특징
호승은 서역승(西域僧)이나 인도승을 다소 폄하하여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사에서 호승은 간과할 수 없는 존재로, 백제와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해준 마라난타와 묵호자가 호승이었다.
(1) 마라난타, 묵호자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전진(前秦)에서 온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지 12년 뒤인 384년(백제 침류왕 1년) 진(晉)에서 호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 땅에 들어와 불교를 전했다. 마라난타는 인도에서 중국에 온 승려로 불교 전도에 열심이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침류왕은 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맞아 궁성 안에서 예경(禮敬)하였으며, 다음 해에 마라난타는 백제의 수도인 한산(漢山, 현 서울)에 절을 세우고 승려 10명을 출가시켰다고 했다. 『해동고승전』「마라난타전」에 의하면 백제는 마라난타의 설법을 받들어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고 하였다. 이처럼 백제 불교는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신라는 6세기 초에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군신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던 중, 527년(신라 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선구적인 인물은 인도승 묵호자(墨胡子)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묵호자는 5세기 초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를 통해 신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신라 변방에 위치한 일선군(一善郡, 현 善山郡)으로 들어와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서 굴을 파고 방을 만들어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때 양나라에서 사신 원표(元表)를 시켜 의복류와 향을 보내왔으나 왕과 신하들이 모두 향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랐다. 왕은 사람을 시켜 향을 널리 나라 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그런데 묵호자가 이를 보고서 그 이름이 향이라는 것과 불에 사르면 향기가 몹시 풍기는데, 이것은 정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신성이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축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왕녀(王女)의 병이 위중하던 차에 묵호자는 왕의 부름을 받고 가서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했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묵호자는 신라 불교 개척의 선구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눌지왕의 후대인 비처왕(毗處王) 때 등장하는 아도(阿道) 화상(和尙)은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같은 모례의 집에 들어왔다. 아도는 모례의 집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계속 머물면서 경(經), 율(律)을 강독하니 신봉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의 아도 화상은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눌지왕 때의 묵호자와 비처왕 때의 아도 화상은 동일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5세기 초 눌지왕 때의 호승 묵호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 승려가 된다. 그 후 신라는 6세기 초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2) 지공
백제와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해준 호승 마라난타와 묵호자 외에도 지공(指空)은 고려 후기 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승이다. 인도승 지공은 본래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19세에 능가국(楞伽國)의 정음암(頂音菴)에 있던 보명(普明) 밑에서 정진하며 의발(衣鉢)을 전수 받았다. 그 뒤 지공은 티베트를 거쳐 원나라대도(大都)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가 원에서 고려를 방문하여 머물렀던 기간은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약 2년 7개월이었다. 지공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 3월에 고려에 도착하여 개경의 감로사(甘露寺)를 시작으로 하여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 유점사], 연복사, 통도사, 회암사지(檜巖寺址) 등을 방문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많은 고려인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또 그의 설법에 고려인들은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지공이 원에 돌아가 연도에 머물고 있을 무렵,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나옹혜근(懶翁慧勤)에게 법원사(法源寺)에서 의발을 전수했고, 또 무학자초(無學自超), 정지국사지천(智泉), 백운경한(白雲景閑) 등으로부터 친견을 받고 선법을 전하여 고려말의 선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에 조정의 대신들이 불교를 이야기할 때 ‘호승’이라고 하면, 대체로 마라난타와 묵호자를 지칭하였다. 그런데 ‘호(胡)’라는 단어는 오랑캐를 비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후기에 이르면 오랑캐를 지칭하는 용어의 사용이 청과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있었다. 이에 숙종대 사은사가 중국에 『동문선』을 갖고 갈 때, 호승(胡僧), 호월(胡越), 이말(夷靺) 등 오랑캐라는 의미가 담긴 글자들을 급히 다른 글자로 바꾸어 주자(鑄字)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고쳐서 수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숙종실록』 39년 8월 15일).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 윤기엽, 『고려후기의 불교』, 일조각, 2012.
- 이기백,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 허흥식,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일조각,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