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鑄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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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주자 |
한글표제 | 주자 |
한자표제 | 鑄字 |
관련어 | 금속활자(金屬活字), 연참(鉛槧), 이녕보장(李寗寶藏), 주물사(鑄物沙), 주자소(鑄字所)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쇄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시대~조선시대 |
집필자 | 옥영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주자(鑄字) |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쇠붙이를 녹여 만든 활자.
개설
주자(鑄字)는 우리나라에서 쓰인 전통적인 용어로 기본적으로 구리나 납, 쇠 등을 녹여서 활자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활자를 통칭 금속활자(金屬活字)라 하고, 이 활자로 찍어낸 책을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 또는 금속활자판(金屬活字版)이라 일컫고 있다. 중국이 대부분의 책들을 목판을 이용하여 인쇄한 것과는 달리 고려와 조선은 금속활자를 많이 사용하여 책을 인쇄하였고, 주자 기술은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금속활자가 다양하게 주조되었는데, 이러한 다양성은 다른 나라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현상임에 틀림없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목판 인쇄술에 비하여 인력, 시간, 비용을 절감하고 신속한 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쇄 기술사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 주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 문종조(文宗朝, 재위 1046~1083) 기원설이다. 이 설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고려국오관산대화엄영통사증익대각국사비명병서(高麗國五冠山大華嚴靈通寺贈謚大覺國師碑銘並序)」에서 “대각 국사의천이 신미년(1091) 봄에 남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찾아서 구한 서적이 무려 4,000권이었다. (중략) 곧바로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 오류를 간정(刊定)할 것을 원하여 연참(鉛槧)을 주상하였다.”라는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연참을 연판(鉛版)이나 연활자판(鉛活字版) 또는 금속활자판 등으로 해석한 데에서 생겨난 기원설이다.
이에 천혜봉(千惠鳳)은 ‘연참’이란 단어는 도말(塗抹)하는 데 쓰는 연분(鉛粉)과 문자를 쓰는 서판(書板)이 합쳐진 용어로서, 본뜻은 ‘연분으로 서판에 칠하는 것은 지금의 분판(粉板)과 같다[謂以鉛粉塗于槧 如今之粉板也]’는 것이며, 위의 인용문 또한 문자의 유결(謬缺)을 교정하여 판각하는 ‘도필각서(刀筆刻書)’의 뜻으로, 활자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고려 숙종조(肅宗朝, 재위 1095~1105) 기원설이다. 이 설은 『고려사(高麗史)』 숙종 7년(1102) 12월조에 전화(錢貨)의 유용성에 대해 논하면서 고주법(鼓鑄法)으로 필요한 주전 15,000관을 만들고 이를 해동통보(海東通寶)라 하였다는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철의 이용 정황에 근거하여 화폐 주조에서 활자 주조로 전환하는 것은 아무런 새로운 기술을 요하지 않으므로 이때 금속활자도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위의 주전(鑄錢)에 도입한 고주법을 바로 고려 금속활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과 더불어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려 복활자(復活字,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속 성분이 해동통보의 금속 성분과 거의 같다는 것을 또 다른 증거로 들고 있다. 이는 주전의 고주법을 임의적으로 주자의 고주법으로 간주하고, 고려 활자와 해동통보의 금속 성분이 거의 비슷한 점을 들어 동일한 주조 연대로 추정한 데에서 나온 설이다.
셋째, 1120년대 기원설이다. 이 설의 실증적 자료가 된 책은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이다. 이 책의 권말에 찍힌 두 개의 소장인(所藏印) 가운데 하나를 ‘이녕보장(李寗寶藏)’으로 판독하고, 이녕이 1124년(고려 인종 2)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다가 『고문진보대전』을 들여와 1160년대에 금속활자로 간행하였다고 보았다. 『고문진보대전』 활자의 먹 자국이나 너덜이(주조 흔적) 등의 문제도 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천혜봉은 『고문진보대전』의 ‘대전(大全)’이란 두 글자에 대해, 김종직(金宗直)의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 말미의 발문에 “경태(景泰) 초년에 한림시독(翰林侍讀) 예 선생(倪先生)이 지금 금본을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 전해 주었다. 거기에 수록된 시와 문장은 구본에 비해 수배나 되므로 이름을 《대전(大全)》이라 하였다[景泰初 翰林侍讀倪先生 將今本以遺我東方 其詩若文 視舊倍蓰 號爲大全].”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사신 예겸(倪謙)이 1450년(세종 32) 조선에 올 때 가지고 온 책이 구본(舊本)의 내용보다 훨씬 뛰어나 ‘대전’이란 명칭을 덧붙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1451년(문종 1) 경오자(庚午字)로 처음 찍었다는 주장으로 이 설을 부인하였다.
넷째, 1232년(고려 고종 19) 이전 기원설로, 현재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설은 주자본(금속활자본)을 중조(번각)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의 책 끝에 “이에 공장들을 모집하고 주자본을 중조하여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기해년(1239) 9월 상순 중서령진양공 최이(崔怡)는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라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연구와 발견에 의해 금속활자의 등장 연대는 더 소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주물사(鑄物沙), 즉 주물모래에 의한 활자 주조법을 논하는 모든 연구에서 기본 사료로 인용하는 것이 성현(成俔)이 저술한 『용재총화(慵齋叢話)』 권7의 다음 기록이다. “태종께서 영락(永樂) 원년에 좌우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거늘, (중략) 대개 글자를 주조하는 법은 먼저 황양목(黃楊木)을 써서 글자를 새기고, 해포(海蒲)의 부드러운 진흙을 평평하게 인판(印版)에다 폈다가 목각자(木刻字)를 진흙 속에 찍으면 찍힌 곳이 패여 글자가 되니, 이때에 두 인판을 합하고 녹은 구리를 한 구멍으로 쏟아부어 흐르는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글자가 되면 이를 깎고 또 깎아서 정제한다.”
이 기록에는 찍는 목활자의 상하 방향, 한 판 안에서의 중복 사용 여부, 목활자 제거 방법, 탕도·가지쇠, 가지쇠의 종류, 만드는 방법 등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를 보완하여 주물사 주조법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형틀을 상하로 분리하고, 아래 틀을 뒤집어 놓고 안쪽의 바닥에 부자(父字)를 배열한다. 이때 쇳물이 지나가는 탕도와 활자의 크기 등을 고려하여 글자 면이 위로 향하도록 배치한다. 2) 분리제를 활자와 바닥에 고루 뿌린 후 모래 체를 사용하여 주물사의 덩어리나 이물질을 거르면서 아래쪽의 부자 주변에 고루 채워지도록 한다. 3) 주형틀 안에 주물사가 1/2 정도 채워지면 다지개로 틀 내부를 가볍게 두드리거나 압착하여 묻어 있는 부자가 고정되도록 한다.
4) 모래 체를 이용하여 주물사를 주형틀의 2/3까지 채우고 다지개로 두드리고 누른다. 5) 주물사를 주형틀의 윗면까지 눌러 채우고 고른 후 평평한 자로 수평이 맞도록 주물사를 깎고 밀어내고, 주물사 채우기가 끝나면 아래 틀을 뒤집는다. 6) 탕구 부분에 주물사를 보충하고 메워서 탕도에 쇳물이 쉽게 들어가도록 형체를 만들고 단단하게 눌러 변형이 되지 않도록 한다. 7) 위 틀과 결합시켰다가 다시 떼어 낼 과정을 대비하여 다시 분리제(숯가루 등)를 뿌린다.
8) 이때 같은 주형틀의 배열판에서 『용재총화』의 주자법을 시도한다. 부자의 글자 면을 위에서 아래의 주물사 방향으로 압박하여 눌러 꽂으면 부자가 빠져나온 자리, 즉 모자형의 주위가 부자가 들어간 만큼 주물사가 밀려 나오므로 이를 정리하여 고른 후 모자형 주변을 다시 눌러 다진다. 9) 위 틀을 아래 틀과 맞추어 얹고 테두리에 부착된 상하 연결쇠를 고정한 후 모래 체로 주물사를 걸러 채운다. 10) 위 틀의 상단까지 주물사가 차면 곧은 자로 평평하게 수평을 맞춘다.
11) 연결된 아래위 틀을 분리시키고 부자를 쉽게 빼낼 수 있도록 약간의 충격이 될 정도로 뒷면을 가볍게 두드린다. 12) 물을 묻힌 붓으로 대체적인 탕도와 가지를 그리고 그림에 따라 조각도로 주물사를 파낸다. 13) 부자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부자 뒷면을 송곳 등으로 가볍게 찍어 수직으로 들어내고 습기를 낮추기 위하여 열을 가한다.
14) 아래위의 두 판을 합치고 연결고리를 채워 고정시킨다. 준비된 주형틀은 쇳물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지게 고정시킨다. 15) 활자에 쓰일 적량과 적정 성분을 함유한 구리, 주석 등을 도가니에서 녹인 후 주형틀에 붓고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 16) 주형틀을 분리하여 가지쇠에서 활자를 쇠톱으로 잘라 내고 부드러운 사포로 글자 면과 활자 기둥 등을 전체적으로 다듬어 완성한다.
주자로 인쇄된 책과 목활자로 인쇄된 책을 구분하는 것은 오랜 경험과 세밀한 관찰력을 요구한다. 고서의 경우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책 표면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원판이 닳거나 보자(補字)가 있을 경우에는 구별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금속활자본과 목활자본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구분 요소가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글자 모양에 있어 금속활자는 주형을 만들어 주조하므로 글자 모양이 같고 정연하다. 반면 목활자는 동일한 글자라도 같은 모양의 글자가 없다. 글자 획을 살펴보면, 금속활자는 획의 굵기와 가늘기가 고르고 정연한 편이다. 그러나 목활자는 차이가 심하여 정연하지 못한 편이다. 활자가 마멸될 경우 금속활자본은 글자의 획이 가늘어지고 일그러지더라도 글자의 획은 붙어 있다. 그러나 목활자는 부분적으로 결락이 생겨 인쇄가 조잡해진다.
금속활자에는 칼자국이 없으나 목활자는 글자 획에 칼자국이 예리하게 나타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로획과 가로획이 겹치는 부분에 칼이 스친 흔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금속활자는 주조한 다음 줄로 마감질을 하므로 글자 끝이 둥글둥글한 맛이 나지만, 목활자는 너덜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금속활자본은 유연묵을 사용하므로 일반적으로 묵색이 진하지 않고,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관찰하면 반점이 나타난다. 그러나 목활자본은 송연묵을 사용하므로 일반적으로 묵색이 진하고,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관찰하면 주위에 먹물이 번져 있다.
금속활자본과 이를 저본으로 하여 그대로 번각한 번각본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 또한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목활자본과 마찬가지로 번각본 또한 금속활자와 구별되는 요소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금속활자본은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것이 나타나며, 혹은 거꾸로 된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번각본은 활자본을 뒤집어 붙여 그대로 새긴 것이므로, 글자의 위치는 저본의 활자본과 같다. 또 금속활자본은 글자의 줄이 대체로 바르지 않고 좌우로 출입이 심한 경우가 있지만, 번각본은 글자의 줄이 저본의 활자본과 같다.
번각본은 각수(刻手)의 솜씨 여하에 따라 글자꼴에 차이가 생긴다. 능숙한 각수는 저본의 글자대로 새겨 내지만 그렇지 못한 각수는 정연하게 새기지 못한다. 여러 번 번각한 경우에는 글자꼴에 큰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또 글자 획의 고르기에 있어서도 판각술이 우수한 각수가 새긴 것은 저본 글자의 획처럼 정연하나, 솜씨가 떨어지는 각수가 새긴 것은 글자의 획이 정연하지 않다.
글자 간격을 보면, 금속활자본은 위 글자와 아래 글자의 사이가 떨어져 있지만 번각본은 저본의 활자본과 같다. 금속활자본은 일반적으로 묵색이 진하지 않은 편이나, 한 면에 농담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번각본은 일반적으로 묵색이 진한 편이며, 한 면의 묵색도 진하거나 엷음의 차이가 별로 없이 순연하다. 또 번각본은 대체로 송연묵을 쓰므로 묵색이 진하나,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보면 먹물이 주위에 번져 있다.
글자 자체 요소의 차이뿐만 아니라 판식에도 차이가 있다. 조립식으로 조판한 금속활자본은 광곽(匡郭)의 네 귀퉁이 어딘가에 틈이 있고, 고착식인 경우에는 틈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 판을 짠 것이기 때문에 어미와 판심의 좌우 선이 떨어져 간격이 있다. 그러나 번각본은 목판에 새긴 것이므로 광곽의 네 귀퉁이가 틈이 없이 붙어 있고, 어미와 판심의 좌우 선이 붙어서 간격이 없다.
이상과 같이 금속활자본과 목활자본, 번각본의 구분은 여러 가지 구별되는 요소가 존재하지만, 실제 감정에 있어서는 이들 중 한두 가지 요소로 판본을 확정하기는 어렵다. 즉 다양한 요소를 세밀하고 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감정상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배제시켜야 더욱 정확한 감정이 가능하다.
의의
사료를 통해서 확인하였을 때 한국은 세계 최초,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선인들의 삶의 지혜와 지식에 대한 열망, 문화에 대한 애착이 깔려 있었으며, 그 결실이 금속활자라는 가시적인 성과물로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금속활자는 목활자 또는 목판에 비해 대량으로 많은 책을 인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제작비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쇠의 사용에 대한 정책적 통제 등의 요인으로 말미암아 다른 판본보다 일반화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전적에 대하여는 국가가 주도하여 대량으로 인쇄·배포하여 지식과 문화 보급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또 금속활자 인쇄가 비교적 어려웠던 지방 관아나 개인의 경우 목활자나 목판으로 다양한 문집이나 족보 등의 전적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볼 때 주조술은 인쇄 문화의 발전, 지식의 보급,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 탐구당, 1974.
- 남권희, 『갑인자와 한글활자』, 청주고인쇄박물관, 2007.
- 윤병태, 『조선후기의 활자와 책』, 범우사, 1992.
- 윤병태, 『한국서지학논집』, 민창문화사, 1999.
- 천혜봉, 『한국서지학(개정판)』, 민음사, 1997.
- 천혜봉, 『한국전적인쇄사』, 범우사, 1990.
- 김성수, 「조선후기의 금속활자 주조방법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39, 2008.
- 김원룡, 「이씨조선주자인쇄소사 -주자소를 중심으로-」, 『향토 서울』3, 1958.
- 유대군, 「조선초기 주자소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藤田亮策, 「鑄字所應行節目に就きて」, 『書物同好會報』11, 194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