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겸(倪謙)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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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예겸 |
한글표제 | 예겸 |
한자표제 | 倪謙 |
관련어 | 『봉사조선창화집(奉使朝鮮倡和集)』, 사행(使行),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조선기사(朝鮮紀事)』, 『요해편(遼海編)』, 토목보(土木堡)의 변, 창화(倡和) 외교 |
분야 | 정치/외교/접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규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자: 극양(克讓), 호: 경서후인(經鋤後人) |
성별 | 남 |
생년/일 | 1415년 |
몰년/일 | 1479년 |
출신지 | 명(明) 응천부(應天府) 상원현(上元縣)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예겸(倪謙)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1년 12월 22일, 『세종실록』 32년 윤1월 1일, 『세종실록』 32년 윤1월 3일, 『세종실록』 32년 윤1월 20일 |
명의 관료로 세종대에 명의 황제 경태제(景泰帝)의 등극을 알리기 위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온 인물.
개설
예겸(倪謙)은 응천부(應天府: 현 하남성 상구) 상원현 출신이다. 자(字)는 극양(克讓)이고, 호(號)는 경서후인(經鋤後人)이다. 그가 공부하였던 서재의 이름은 정존헌(靜存軒)이었다. 143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훗날 학사(學士)로 승진해 황태자를 모셨다. 하지만 순천향시(順天鄕試)를 주관하다가 부정행위를 한 권력자의 아들을 시험장에서 퇴장시킨 일 때문에 귀양을 갔다. 나중에 다시 복직하여 예부(禮部) 상서(尙書)까지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예문희집(倪文僖集)』 등을 남겼다. 그가 죽은 뒤 받았던 시호가 ‘문희(文僖)’였기 때문이다.
활동 사항
1449년(세종 31) 조선 조정은 명에서 사신 예겸과 사마순(司馬恂)이 경태제(景泰帝)의 등극을 알리는 조칙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당시 세종과 세자가 모두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세종은 세자에게 관련된 의례를 준행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1년 12월 22일).
당시 예겸의 관직은 한림시강(翰林侍講)이었고, 사마순의 관직은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이었다. 예겸은 토목보(土木堡)의 변에 대한 전후 사정을 조선 측에 설명하였다. 그는 태상황제(太上皇帝: 명 영종)가 매일(날마다) 경연(經筵)에 참여하면서 정사를 돌보는 훌륭한 황제였지만 간신(姦臣) 왕진(王振) 때문에 북방의 몽골 정벌에 나서 거용관(居庸關)에서 크게 패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예겸은 명의 황제가 적에게 사로잡힌 책임이 왕진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1일).
조선에 있는 동안 예겸은 시 한 편을 지어 정인지(鄭麟趾)에게 주었는데, 정인지 역시 운(韻)에 따라 시를 지어 주었다. 이로부터 예겸은 정인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매일 시를 주고받으며〔倡和〕 시간을 보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3일).
하지만 예겸은 수양대군이 주도한 전별연에서 조선의 사신 접대를 문제 삼았다. 예겸은 조선 왕의 병은 명에서도 모두 알고 있지만 세자의 병환은 자신들이 황주(黃州)에 이르러서야 처음 들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조선의 세자가 할 수 없이 조서만 맞이하고, 그 뒤에는 자신들을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으니 명의 사신을 가볍게 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명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라고 하며, 조선이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고 말하였다. 세종과 수양대군은 예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해명하였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20일).
저술 및 작품
『봉사조선창화집(奉使朝鮮倡和集)』·『조선기사(朝鮮紀事)』·『요해편(遼海編)』 등의 저술을 남겼다. 『봉사조선창화집』은 예겸이 1450년 정월에 경제(景帝)의 즉위를 알리기 위하여 조칙을 가지고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 남겼던 글이다. 그는 원접사(遠接使) 정인지·신숙주·성삼문 등과 창화하였던 시문을 정리해서 편집하였다. 따라서 『봉사조선창화집』은 조선과 명 사이 창화 외교의 상징적 문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기사』는 예겸이 인솔하던 사행단의 62일간의 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글이다. 『요해편』은 예겸이 조선으로 파견되어 오는 동안 지었던 시부(詩賦)와 기행문(紀行文), 지인들에게 받았던 시문(詩文) 등을 편집해 놓은 글이다. 예겸의 아들 예악(倪岳)이 편집해서 출간하였다. 이외에도 『예문희집(倪文僖集)』 등의 문집을 남겼다.
참고문헌
- 『국조헌징록(國朝獻徵錄)』
- 『명헌종실록(明憲宗實錄)』
- 『명사고(明史稿)』
- 『명사(明史)』
- 『명통감(明通鑑)』
- 『봉사조선창화집(奉使朝鮮倡和集)』
- 『조선기사(朝鮮紀事)』
- 『요해편(遼海編)』
- 『예문희집(倪文僖集)』
- 김한규, 『사조선록 연구-송·명·청 시대 조선 사행록의 사료적 가치-』, 서강대학교출판부, 2011.
- 성원경, 「명 예겸 저 『조선기사』의 평역」, 『인문과학논총』 24, 건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2.
- 신승운, 「예겸의 『봉사조선창화시권』에 대한 연구」, 『서지학연구』 28, 한국서지학회, 2004.
- 왕석천·조희무, 「압록절향; 신숙주여예겸(申叔舟與倪謙)」, 『외국문화연구』 20, 조선대학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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