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자(庚午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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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오자 |
한글표제 | 경오자 |
한자표제 | 庚午字 |
상위어 | 금속 활자(金屬活字) |
동의어 | 안평대군자(安平大君字), 안평자(安平字), 임신자(壬申字) |
관련어 | 안평대군(安平大君), 을해자(乙亥字), 주자소(鑄字所)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쇄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문종 |
집필자 | 옥영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오자(庚午字) |
1450년(문종 즉위) 안평대군의 글씨를 바탕 글자로 삼아 주조한 금속 활자.
개설
경오자(庚午字)는 안평대군이용(李瑢)의 서체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1450년(문종 즉위) 7월 4일부터 주자소에서 주조하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28일 이전에 주조되었다. 안평대군의 서체를 확인할 수 있는 조선초기 왕실 주조의 금속 활자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맞물려 그 사용 시기가 가장 짧았던 활자이다.
활자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활자가 주성된 문종 즉위년의 간지에 따라 ‘경오자’라고 하며, 바탕 글자를 쓴 안평대군의 군호(君號)를 따서 ‘안평자(安平字)’ 또는 ‘안평대군자(安平大君字)’라고도 한다. 국내에 경오자로 인쇄한 책은 매우 드문 편이며, 알려진 현존본은 『역대십팔사략』·『역대병요』·『상설고문진보대전』·『신편산학계몽』 등이다.
내용 및 특징
경오자의 주조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경오자설과 임신자(壬申字)설이 대립되어 왔다. 경오자설은 1450년에 주조되었다는 것으로, 『성종실록』의 1474년(성종 5) 11월 22일 기사에서 안평대군의 글자체를 경오자로 칭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
또한 경오자본 『역대십팔사략』과 『신편산학계몽』의 권말에 나타나는 간기(刊記)에 ‘경태이년팔월일인출(景泰二年八月日印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경오자 소자(小字)로 인출한 경자자(庚子字)와 갑인자(甲寅字)의 주자발(鑄字跋)에 이어 나타나는 인기(印記)이므로 이전에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신자설은 1452년(문종 2)에 주조되었다는 설로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수록된 “임신 연간(1452)에 문종께서 다시금 경자자를 녹이고 안평대군에게 쓰도록 명하여 활자를 주성하고 그 이름을 임자(신)자라 하였다. 을해년(1455)에 세조께서 임신자(壬申字)를 고쳐 녹여서 강희안(姜希顔)에게 쓰도록 명하여 활자를 주성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 하였는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라는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용재총화』의 기록은 『정조실록』·『연려실기술』·『임하필기』·『퇴계선생문집고증』·『지퇴당집』·『해동야언』 등 후대의 문헌과 주자발 등에 그대로 전재(轉載)하였기 때문에 임신년 주조설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실물과 기록의 양면 고증으로 경오자설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다. 경오자가 주성되던 1450년 경오년 2월 17일에 부왕 세종이 승하하자 대군들은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주자소에서 공공연히 불경을 인출해 냈다. 그러나 이를 중단하라는 유신들의 반대 상소가 잇달아 올라오자 문종은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7월 4일에 이조(吏曹)에 전지하여 임시로 주자소를 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해 10월 30일까지 대군들은 정음청(正音廳)에서 불경을 인출해 냈는데, 이때 주조해 낸 활자가 경오자이다. 경오자는 안평대군의 독특한 글씨를 자본으로 주조한 대자(大字)와 소자(小子)였다.
그해 10월 28일 안완경(安完慶)과 어효첨(魚孝瞻) 등이 정음청의 혁파를 청하는 등 계속적인 상소가 잇따르자 결국 정음청에서의 인출은 『소학』의 인쇄를 마지막으로 12월 17일 경오자의 활자도 주자소에 다 돌려주었으며, 1452년(단종 즉위) 11월 2일에는 정음청도 혁파되었다. 이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안평대군은 이를 반대하다가 사사되었는데, 경오자 또한 녹여져서 1455년(세조 1) 을해자로 주조되기에 이르렀다.
을해자의 주조와 관련된 기록 중에 경오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성종이 김영견(金永堅)에게 책의 간행에 사용하는 활자의 종류를 묻는 내용이 있다. 김영견은 1434년(세종 16) 갑인년과 1455년 을해년에 만든 활자를 사용한다고 말한 후, 책의 인쇄에는 경오자가 으뜸인데 안평대군이 바탕 글자를 쓴 것이라 이미 훼손되었으며, 을해자는 강희안에게 명하여 자본을 쓰도록 하여 제작한 것이라 하였다. 서적을 인쇄하는 데에는 경오자가 더 좋으나 안평대군이 바탕 글자를 쓴 활자라는 이유로 이를 녹이고 다시금 강희안에게 쓰게 하여 을해자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경오자는 짧은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인본이 매우 드문 편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인본은 일본 족리학교 유적도서관의 『역대십팔사략』 완질본과 경도대학도서관의 『역대병요』, 용곡대학도서관의 『상설고문진보대전』 전·후집 완질본이 있으며, 국내에는 『신편산학계몽』과 『상설고문진보대전』 중 그 잔 권 몇 책이 청주고인쇄박물관·성암고서박물관을 비롯한 몇 곳에 산재해 있다.
변천
1403년(태종 3) 처음으로 주자소에서 계미자(癸未字)가 주조된 이래, 세종 연간에는 1420년(세종 2)에 경자자, 1434년에 갑인자, 1436년(세종 18)에 병진자(丙辰字), 1447년(세종 29)에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 병용 한글자 등이 주조된 바 있다. 이어서 주조된 것이 문종 연간(1450~1452)인 1450년에 주조된 경오자이다.
경오자는 1450년 7월 4일부터 안평대군의 서체를 바탕 글자로 하여 주자소에서 주조하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28일 이전에 주성되었는데, 안평대군이 쓴 글자를 자본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곧바로 녹여져 을해자로 주조되었다.
의의
경오자는 안평대군의 글자를 자본으로 한 큰 자와 작은 자로서, 글자체가 독창적이었고 이전의 갑인자나 이후의 을해자보다도 서적의 인출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사용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인본이 많지 않으며, 남은 인본도 대부분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정치적 배경에 따라 비운의 활자가 되고 말았지만 활자의 주조와 필사된 글씨의 관련성에 있어서 경오자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필사된 글씨와 주조된 활자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나기 마련이지만,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대규모로 주조된 활자 가운데 바탕 글자를 쓴 이의 서체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활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김두종, 『한국고인쇄기술사』, 탐구당, 1973.
- 천혜봉, 『한국 서지학』, 민음사, 2006.
- 『금속활자 주조 및 인쇄기술사 복원 연구 결과보고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6.
- 『조선왕실 주조 금속활자 복원사업 결과보고서』, 청주고인쇄박물관,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