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자(癸未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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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계미자 |
한글표제 | 계미자 |
한자표제 | 癸未字 |
상위어 | 금속활자(金屬活字) |
관련어 | 경자자(庚子字), 주자소(鑄字所) |
분야 | 교육·출판/출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전기 |
왕대 | 태종 |
집필자 | 김소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계미자(癸未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3년 2월 13일, 『정조실록』 18년 1월 24일, 『정조실록』 20년 3월 17일, 『세종실록』 3년 3월 24일, 『세종실록』 16년 7월 2일, 『세종실록』 3년 3월 24일, 『태종실록』 12년 7월 9일, 『태종실록』 12년 10월 1일, 『태종실록』 13년 2월 30일, 『태종실록』 16년 3월 27일 |
1403년(태종 3)에 주자소에서 만든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
개설
계미자(癸未字)는 1403년(태종 3)에 다양한 서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주자소에서 만든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활자이다. 이 활자로 인출한 인본을 계미자본이라고 칭한다. 태종의 명으로 이직(李稷), 민무질(閔無疾), 박석명(朴錫命), 이응(李膺) 등이 경연청에 소장되어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춘추좌씨전』의 글자체를 토대로 하여 수개월 간에 걸쳐 계미자 수십만 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활자는 조선초기의 주조기술과 조판기술의 미흡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하고, 1420년(세종 20)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한 경자자(庚子字)가 주조되었다.
내용 및 특징
태종은 왕권이 안정되자 관제를 개편하고 숭문정책을 시행하였다. 유생들의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서는 서적의 보급이 절실했지만, 당시에는 서적이 매우 적었고 중국에서 서적을 들여오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한 서적의 간행에 자주 사용했던 목판은 쉽게 이지러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책을 찍어 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태종은 1403년(태종 3) 2월 13일에 주자소를 설치하라고 지시하였고, 이로부터 6일 만인 2월 19일에 계미자의 주조를 명하였다. 계미자는 주조가 시작된 지 수개월이 지나 수십만 자가 만들어졌다.
계미자를 만들기에 앞서 태종은 내부(內府)의 동철(銅鐵)을 내놓는 한편 대소 신료 및 종친·훈신에게도 재료에 사용할 동철을 자원(自願)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3년 2월 13일).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의(眞西山讀書記乙集上大學衍義)』, 『근사록(近思錄)』,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에 수록된 권근(權近)이 작성한 계미자 주자발(鑄字跋)에 따르면, 계미자의 주조는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이직(李稷), 여성군(驪城君)민무질, 지신사(知申事)박석명, 우대언(右代言)이응 등이 감독하고, 군자감(軍資監)강천주(姜天霔), 장흥고(長興庫) 사(使)김장간(金莊侃), 대언동주서(代言同注書)유이(柳荑), 수령부승(壽寧府丞)김위민(金爲民), 교서저작랑(校書著作郞)박윤영(朴允英) 등이 담당하였다.
글자체는 경연청에 소장되어 있던 『시경』·『서경』·『춘추좌씨전』의 고주본의 글자를 토대로 하였는데(『정조실록』 18년 1월 24일)(『정조실록』 20년 3월 17일), 현전하는 계미자본의 서체를 보면 남송의 촉본(蜀本)에서 볼 수 있는 구양순체(歐陽詢體)의 바탕에 원필(圓筆)이 섞여 있다.
계미자의 조판 방식은 먼저 활자를 구리판[銅板] 위에 배치한 후 가열한 황랍(黃蠟)을 그 위에 부어 밀랍이 단단히 굳으면 찍어 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밀랍의 수요가 많을 뿐만 아니라 밀랍의 고정력이 약했기 때문에 활자가 자주 흔들려서 하루에 찍어 낼 수 있는 양이 두어 장에 불과했다(『세종실록』 3년 3월 24일). 두세 장을 찍고 나면 매번 비뚤어진 활자를 바로잡아야 하는 수고로움을 반복해야 했으므로 인쇄하는 장인들이 매우 괴로워했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 이러한 계미자의 조판에서 드러난 단점으로 인해 세종은 1420년(세종 20)에 공조 참판이천(李蕆)과 전 소윤남급(南汲)에게 명하여 구리판을 다시 글자의 모양에 맞게 만들었다. 이로써 밀랍을 녹여서 붓지 않아도 글자가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글자의 획이 더욱 발라서 하루에 수십 장에서 100장을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세종실록』 3년 3월 24일). 이때 만들어진 활자가 바로 조선시대에 두 번째로 주조된 금속활자인 경자자이다.
계미자는 주조기술과 조판방식이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주조한 활자본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에 비해 어느 정도 개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활자 크기와 모양 및 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다. 이처럼 상태가 균일하지 못한 활자를 네 모퉁이가 고정된 고착식 철우리에 조판하다 보니 실제로 계미자본을 보면 위아래 활자가 맞물리거나 한 행에 들어가는 활자의 숫자가 일정하지 못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계미자본은 한 면에 들어가는 활자 수와 판심의 모양 및 인판틀을 토대로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면에 들어가는 행자수는 대체로 8행 19자이며, 판심은 상하에 흑어미(黑魚尾)가 있고, 인판틀은 네 모퉁이가 붙어 있는 고착식 철우리를 사용하여 사주(四周)가 붙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계미자본은 7종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1412년(태종 12)에 인출한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권16~17(총 2책, 권16은 국보 제148-1호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권17은 국보 제148-2호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태종실록』 12년 7월 9일),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권4~6(총 3책, 권4~5는 국보 제149-1호로 간송미술관 소장, 권6은 국보 제149-2호로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송조표전총류(宋朝表牋總類)』 권1~11(권1-2는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권3은 대구 고서점 소장, 권4~7은 경기도박물관 소장, 권8~10은 개인 소장, 권6~11은 호암미술관 소장, 권7은 국보 제150호로 가람(嘉藍)이병기(李秉岐) 구장본이었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계미자 소자본인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 권5~8(총 3책, 권5~6의 2책은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권7~8의 1책은 개인 소장),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권1·3(총 2책, 권1은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권3은 고 김완섭(金完燮) 소장), 『지리전서범씨동림조담(地理全書笵氏洞林照膽)』 권상·하(1책,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찬도호주주례(纂圖互註周禮)』 권1~2(1책,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등이다.
또한 경자자본을 인출할 당시에 서문만을 계미자로 찍어 낸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1책, 범우사(汎友社) 윤형두 소장)와 『통감속편(通鑑續編)』 24권 6책(국보 제283호, 경주 양동경주손씨 서백당 종가 소장,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 『중신교정입주부음통감외기(重新校正入註附音通鑑外記)』(윤형두 소장본, 서문이 없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가 있다.
현전본 외에도 기록을 통해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의』(『태종실록』 12년 10월 1일), 『원육전』과 『속육전』(『태종실록』 13년 2월 30일), 『승선직지록(乘船直持錄)』(『태종실록』 16년 3월 27일), 『동국약운(東國略韻)』[『태종실록』 4월 15일(정축) 3번째기사] 등의 서적이 계미자로 찍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계미자 번각본(飜刻本)인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1418년 제주목 번각본), 『음주전문춘추괄례시말좌전구두직해(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1454년 금산 번각본), 『십일가주손자(十一家註孫子)』(1409년 번각본), 『대학연의(大學衍義)』(1412년 번각본) 등의 서적도 계미자로 찍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근사록(近思錄)』(木板本,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木板本,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丙辰字飜刻 木板本)
-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의(眞西山讀書記乙集上大學衍義)』(戊申字本)
- 천혜봉, 『한국금속활자 인쇄사』, 종합출판 범우(주), 2012.
- 천혜봉, 『한국서지학』, 민음사, 2007.
- 천혜봉, 『한국금속활자본』, 범우사,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