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완경(安完慶)
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 단종(文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형조 참판(參判)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안택경(安宅慶)이었으나 개명하였다. 호는 정암(貞菴)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한 안처선(安處善)이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두문현 72현 가운데 한 명인 구홍(具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낭장(郞將)안정(安鼎)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총판(摠判)안사충(安社忠)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司宰監)직장(直長)에 보직되었고, 이후 사헌부 우헌납(右獻納)을 거쳐 병조 정랑(正郞)을 등을 지냈다.(『세종실록』 5년 3월 29일),(『세종실록』 9년 8월 6일),(『세종실록』 9년 10월 27일) 이 때, 부사정(副司正)이췌(李萃)의 자급을 함부로 더 올린 죄로 국문(鞠問) 당했지만 곧 석방되었다.(『세종실록』 10년 11월 23일)
1431년(세종 13) 세종과 대신(大臣)들이 영평현(永平縣)보장산(寶藏山)으로 강무(講武)에 나갔다가 추운 날씨로 인해 포천(抱川) 매장원(每場院)에서 멈췄다. 이때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자가 있어 대신들로 하여금 술과 음식을 내어 구조하게 했지만 많은 사람과 말이 죽었다.(『세종실록』 13년 2월 20일) 이 사건으로 당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민의생(閔義生)과 경기도경력(京畿道經歷)안완경(安完慶)은 즉시 구호에 착수하지 않은 죄로 의금부에 갇혔는데 안완경은 곧 복직되었다.(『세종실록』 13년 2월 23일),(『세종실록』 13년 2월 24일),(『세종실록』 13년 2월 25일),(『세종실록』 13년 2월 27일) 1435년(세종 17)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찬집관으로 참여했으며, 이 시기에 문과 중시(重試)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방목(榜目)』]
1436년(세종 18) 여진족 가운데 하나인 올량합(兀良哈)이 평안도에 침입해서 사람과 말, 소를 침탈했다. 이 일로 당시 예문관(藝文官) 직제학이던 안완경이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경차관으로서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이각(李恪)과 여연군지사(閭延郡知事)김윤수(金允壽)에게 적을 막지 못한 죄를 묻고 탄핵했다.(『세종실록』 18년 5월 23일),(『세종실록』 18년 6월 22일) 1437년(세종 19) 형조 지사(知事)로 있을 때, 정상문(丁尙文)과 그의 종숙(從叔) 조홍(祖洪) 사이에서 여종을 주고받는 문제로 소송이 벌어졌다. 이때 안완경은 소송에 개입하여 그들을 억지로 화해시켰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杖) 80의 처벌을 받았다.(『세종실록』 19년 6월 21일)
이후 사간원(司諫院) 우대부(右大夫), 병조 참의(參議)를 거쳐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세종실록』 22년 2월 10일),(『세종실록』 29년 8월 14일),(『세종실록』 29년 9월 9일) 1448년(세종 30) 평안도절제사를 파견할 경우 그 지방에서 음식을 접대하는 폐단이 심하고, 또한 평안도절제사가 강계(江界)와 삭주(朔州)의 군병(軍兵)을 점검할 때 역마(役馬)가 부족할 경우 전마(戰馬)를 빼앗아 쓰는 일이 잦다며 혁파할 것을 건의했다.(『세종실록』 30년 6월 9일),(『세종실록』 29년 11월 6일),(『세종실록』 30년 6월 11일) 이어 얼마 후에는 세종이 문소전(文昭殿) 서북쪽에 불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이사철(李思哲),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이의흡(李宜洽) 등과 함께 문소전은 몸을 청결히 하는 곳이라며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세종실록』 30년 7월 17일)
1449년(세종 31) 안완경은 다른 사람이 벼슬 청탁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수사하여 잡아들이지 않은 죄로 파직당했다.(『세종실록』 31년 1월 26일),(『세종실록』 31년 1월 29일),(『세종실록』 31년 5월 18일) 그러나 그에게 청탁과 관련된 직접적인 동기와 증거가없다는 이유로 복직되었으며, 이후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를 거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31년 7월 1일),(『세종실록』 31년 7월 2일),(『세종실록』 31년 10월 5일) 1450년(세종 32) 병조 참판조서안(趙瑞安)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어 북경으로 가서 채백(綵帛) 받은 것을 사례하고, 세자의 면복(冕服)을 청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7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년) 안완경은 사은사에서 돌아와 노비와 전지를 하사받았으며, 이후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문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이때 조정에‘좌우에서 세력이 커져서 임금을 가린다.’는 말이 돌자, 사헌부 집의(執義)어효첨(魚孝瞻), 사헌부 장령(掌令)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사직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9일),(『문종실록』 즉위년 10월 23일),(『문종실록』 즉위년 10월 27일),(『문종실록』 즉위년 10월 28일) 이후 경연청(經筵廳) 동지사(同知事)로서 경연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경연에서 『원육전(元六典)』과 『속육전(續六典)』, 그리고 병서(兵書) 등을 진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1일),(『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1일),(『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3일)
1451년(문종 1) 사헌부 대사헌이 된 안완경은 조정에서 지속적으로 불사(佛事)의 폐단 및 정지를 건의했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3일),(『문종실록』 1년 2월 21일),(『문종실록』 1년 3월 12일),(『문종실록』 1년 4월 13일) 그러나 그의 족형(族兄)인 승려 축소(竺昭)가 서울에서 불사를 열었으므로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고, 다른 신하들 또한 그를 국문하기를 청했으나 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문종실록』 1년 4월 29일),(『문종실록』 1년 5월 3일) 오히려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풍습에 대한 규칙을 다스리고, 불사를 배척한 공으로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문종실록』 1년 5월 4일)
1452년(문종 2) 안완경은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북경에 갔다가 칙서(勅書)와 상사(賞賜)의 표리(表裏) 8개를 받아왔다.(『문종실록』 2년 3월 26일),(『문종실록』 2년 5월 3일),(『문종실록』 2년 5월 21일) 이후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가 되었다.(『단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
이어 안완경은 중추원 동지사,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1일),(『단종실록』 1년 2월 8일) 한편 그가 1453년(단종 1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충주(忠州) 경상(境上)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고 환대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김종서(金宗瑞),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조수량(趙遂良) 등과 함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되어 추국당하고 양산에 유배되었으며, 고신(告身)마저 빼앗겼다.(『단종실록』 1년 9월 8일),(『단종실록』 1년 10월 11일),(『단종실록』 1년 10월 13일),(『단종실록』 1년 10월 17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권4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홍재전서(弘齋全書)』권60, 잡저(雜著)] 이후 그는 유배지에서 교형(絞刑)에 처해졌고, 그 가족들도 처벌되거나관노(官奴)가 되었다.(『단종실록』 1년 11월 11일),(『단종실록』 1년 11월 23일)
성품과 일화
안완경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겉으로는 봄처럼 온화한 태도로 꾸몄으나 속으로는 여우처럼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남을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치우치게 하고, 음욕(淫慾)이 많아서 집안에 들어가면 상시 속옷을 벗고 첩을 희롱하고 있었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또한 그 성질이 유약해서 그가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모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1일)
배향과 후손
정조(正祖) 때에 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에 배식(配食)할 사람을 뽑았는데, 절의가 가장 높고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 위주로 뽑았다. 이때 안완경은 그 사적이 자세하지 않았으므로 장릉 배식단(配食壇)의 별단(別壇)에 올랐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윤정산(尹定山)은 예조 참의를 지낸 윤수(尹粹)의 딸이다. 안완경이 교형에 처해진 후, 관노가 되었다가 성종(成宗) 때에 풀려났다.(『성종실록』 3년 5월 24일) 자녀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안효손(安孝孫)이고, 딸은 호군(護軍)박임무(朴林茂)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만가보(萬家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