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청(正音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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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음청 |
한글표제 | 정음청 |
한자표제 | 正音廳 |
상위어 | 관서(官署) |
동의어 | 언문청(諺文廳) |
관련어 | 간경도감(刊經都監), 단종(端宗), 문종(文宗), 세종(世宗), 언문(諺文), 정음(正音), 주자소(鑄字所), 책방(冊房), 한글, 훈민정음(訓民正音) |
분야 | 문화/인문학/어문학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박진호 |
폐지 시기 | 1452년(단종 즉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음청(正音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8년 11월 8일, 『세종실록』 31년 3월 26일 |
조선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뒤, 한글에 대한 연구 및 한글 관련 서적의 편찬을 위해 궐내에 설치한 관서.
개설
정음청(正音廳)의 설립 경위 및 시기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뒤, 한글의 기초 연구 및 한글 관련 서적의 편찬을 위해 궐내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이 여기서 활약하여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책을 편찬하였다. 문종대에 이르러 유신(儒臣)들의 폐지 요구에 시달리다가, 단종 즉위년인 1452년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은 한글 창제 사업을 은밀히 추진하였다. 공개적으로 추진하면 처음부터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으므로, 불교 신봉 문제 등으로 신하들과 자주 대립해 온 세종으로서는 굳이 마찰을 초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자는 널리 사용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므로, 한글 창제 사실을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세종은 1443년(세종 25) 12월에 한글을 창제한 뒤, 이듬해 2월 16일 『운회(韻會)』에 한글로 주음(注音)하게 하였다. 이것이 한글과 관련된 최초의 공개적인 사업이다. 『운회』는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고금운회』를 고쳐서 다시 지은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가리킨다. 이 일은 세자의 집무처인 의사청(議事廳)에서 이루어졌으며, 왕자들이 감독하였다. 이로 미루어 이때까지는 아직 정음청이 설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음청의 설립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데, 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1446년(세종 28)에 ‘언문청(諺文廳)’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세종실록』 28년 11월 8일). 『세종실록』에서는 한글을 주로 ‘언문’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언문, 언문청’은 ‘(훈민)정음, 정음청’에 대한 일종의 비칭(卑稱) 또는 속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한글 창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에 비해 『문종실록』에서는 정음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문종이 정음청은 자신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세종실록』의 언문청과 『문종실록』의 정음청이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설치할 당시의 명칭은 정음청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정음청의 설립 시기를 추정해 보면 1446년 11월을 그 하한선으로 설정할 수 있다.
정음청 설립 시기의 상한선은 한글이 창제된 1443년 12월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정음청을, 세종의 명을 받은 학사들이 한글 창제와 관련한 연구를 수행한 일종의 학문 연구 기관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보한재집(保閑齋集)』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한글 창제는 세종이 거의 혼자서 비밀리에 완수하였고 그 뒤에 정음청을 설립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글이 최초로 널리 공개된 시점이 1446년 2월 16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음청 설립의 상한선을 이때로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음청의 설립 목적 역시 기록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뒤에 실제로 담당한 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창제된 한글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여 해설서를 만들고, 한글과 관련된 각종 서적을 편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정음청의 조직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위치는 궐내였고, 환관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듯하다. 환관 최읍(崔浥)이 언문청에서 근무하였으며, 당시 언문청에 있던 사람 가운데 환관과 교호(交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세종실록』 31년 3월 26일). 세종으로서는 한글 관련 사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문신들 대신 환관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신으로서 당시 언문청에서 일한 사람으로는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등을 꼽을 수 있다.
정음청의 역할은 크게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한글 관련 서적을 편찬하는 것과, 이를 위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는 것 두 가지였던 듯하다. 나중에는 주자소의 활자를 이용해 불전(佛典)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는 데도 관여한 듯한데, 특히 불전 간행은 유신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변천
한글 관련 사업을 추진할 뿐 아니라 환관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정음청에 대해 유신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을 테지만, 세종대에는 별다른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유신들의 집중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정음청이 한글 관련 사업보다는 불전이나 『소학(小學)』 등의 서적 간행에 주력하게 되었고, 게다가 주자소의 활자를 가져다 쓰는 문제, 대군(大君)들이 서적을 간행할 때 사사로이 정음청을 이용하는 문제 등이 겹쳤기 때문이다. 문종은 이에 대해 자신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거나, 지금 간행하고 있는 서적이 완성되면 폐지하겠다는 등 책임 회피성 미봉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다가 단종이 즉위하자마자 정음청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용재총화(慵齋叢話)』
- 『보한재전서(保閑齋全書)』
- 강신항, 『훈민정음 연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7.
- 박종국,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4.
- 이숭녕,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 - 학자들과 그 업적』, 아세아문화사, 1981.
- 이숭녕, 『혁신국어학사』, 박영사, 1976.
- 홍기문, 『정음발달사』, 서울신문사, 1946.
- 김동욱, 「정음청시말」, 『서울대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5, 1957.
- 안병희, 「훈민정음 사용에 관한 역사적 연구: 창제로부터 19세기까지」, 『동방학지』46·47·48, 1985.
- 이기문, 「한글의 창제」, 『한국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77.
- 이기문, 「훈민정음 창제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2, 1974.
- 이기문, 「훈민정음 친제론」, 『한국문화』13, 1992.
- 이숭녕, 「세종의 언어정책사업과 그 은밀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 특히 실록 기록의 불투명성과 책방의 노출을 중심으로 하여」, 『하성 이선근박사 고희기념 논문집 - 한국학논총』,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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