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사(開庵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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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로에 있는 절.

개설

개암사(開庵寺)는 백제시대 변산산성(卞山山城) 내에 창건되어 묘암사(妙巖寺) 혹은 개암사(開巖寺)라고도 하였다. 조선초기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祝壽齋)가 여러 차례 개설되면서 국가의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 이때의 가람 배치가 오늘날 절의 원형이 되었고, 대웅전과 괘불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현욱(玄旭)의 기사에서만 개암사(開巖寺)로 표기하고, 그 외에는 모두 개암사(開庵寺)로 다르게 표기하였다. 현재는 개암사(開巖寺)로 표기한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백제시대인 634년(고려 무왕 35) 묘련(妙蓮) 왕사(王師)와 태자 풍장(豊璋)이 창건하였다. 가람을 신축한 것이 아니라 변산산성(卞山山城)의 건물을 절로 삼았으므로 묘암사 혹은 개암사라고 하였다. 묘련 왕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나 풍장은 곧 의자왕의 아들로 주류성(周留城)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부흥운동 당시 왕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주류성은 현재의 사찰이 있는 지역으로 추정되므로 절의 창건은 꽤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2) 조선시대

절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편찬되었는데, 「법당중창기문」(1640년), 「개암사중건사적기」(1658년) 등에는 고려중기에 원감(圓鑑) 국사(國師) 충지(冲止)가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황금전을 비롯하여 청련각, 청허루, 백옥교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들어 1414년(태종 14) 폐허로 남아 있던 절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여 도솔사(兜率寺)라고 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절에서 국가의 탄신 축수재를 개설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23일). 축수재는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재(齋)인데 당시 삼각산승가사(僧伽寺)에서는 충훈부가, 개암사에서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각각 주관하였다. 이후 1475년(성종 6)에도 축수재를 개설하는 등 절은 축수재 도량으로 정착하였다(『성종실록』 6년 7월 28일). 국가가 지원하는 공식적인 법회를 열면서 절은 억불의 사회에서도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세조실록』 2년 9월 7일). 이에 앞선 1466년(세조 12) 절의 현욱이 배 1척을 사사로이 대납(代納)한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관리가 문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수납하여 후에 처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세조실록』 12년 10월 25일). 작은 배이지만 절의 재정이 괜찮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조선후기

임진왜란으로 황금전만을 남기고 소실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계호(戒浩)가 중창하면서 황금전을 대웅보전으로 고쳤다. 1658년(효종 9) 밀영(密英)·혜징(慧澄)·용집(龍集) 등이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이 과정을 금파여여(金波如如)가 「개암사중건사적기」로 편찬하였다. 1749년(영조 25)에는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승(畵僧) 의겸(義謙)이 영산회상괘불(보물 제1269호) 조성에 참여하였다. 이 무렵 인근에는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 등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

(4) 현대

이후 20세기까지 보수와 중건이 계속되었다. 절에는 현재 대웅전과 인등전, 응향각, 응진당 등이 있다. 대웅전(보물 제292호)은 1636년 중건 당시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 부안군, 『부안 개암사 대웅보전: 수리 및 단청문양 조사보고서』, 부안군, 2012.
  •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9, 전북의 전통사찰Ⅱ』, 사찰문화연구원, 1997.
  • 안귀숙, 「조선후기 불화승의 계보와 의겸비구에 관한 연구(상)」, 『미술사연구』8, 미술사연구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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