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수재(祝壽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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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축수재 |
한글표제 | 축수재 |
한자표제 | 祝壽齋 |
관련어 | 축상작법(祝上作法)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축수재(祝壽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1월 3일, 『태종실록』 14년 5월 16일, 『태종실록』 17년 5월 9일, 『세종실록』 3년 4월 9일, 『세종실록』 5년 4월 10일, 『성종실록』 8년 12월 4일 |
왕의 탄생일에 수명이 길어지기를 비는 불교의 재 의식.
개설
조선시대 축수재(祝壽齋)는 병조에서 주로 거행하였고, 삼도감(三都監)·내시다방(內侍茶房)·상의원(尙衣院)·응양위(鷹揚衛) 등의 신하들에 의해 봉행되었다. 축수재 의식은 상위의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고, 무량수불·약사여래·석가여래·소재장보살·치성광여래 등의 원불에 왕의 수명이 만세가 되기를 축원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대부터 불교에서는 나라의 안녕과 왕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을 설행했다. 중국의 후위(後魏) 때 황제의 탄생일에 고승을 궁궐로 초청하여 음식과 재물을 베풀고 복덕과 수명의 장수를 빌었던 것이 축수재(祝壽齋)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사금갑조」의 분수승(焚修僧)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분수승이 궁전 안의 불당인 내불당(內佛堂)에서 전생과 금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업장을 불사르고, 좋은 공덕을 닦았다고 하는 것이 축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한 고려시대에는 1078년(문종 32)에 송 황제의 생일을 맞아 동림사와 대운사에 축수재를 열었고, 1342년(충혜왕 복위 3) 충혜왕이 신효사에 행차하였는데, 등촉을 밝히려고 결사한 향도들이 신효사에서 축수재를 설행하였다. 1352년(공민왕 원년) 5월 6일에는 왕의 생일을 맞아 내전에서 3일 동안 도량을 설립하고, 지장사에서 1,000의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왕을 위해 축수재를 설행하였다.
축수재의 의식은 조선초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불교를 배척한 태종 때에 무용론이 드러나 혁파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운수가 있는데,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며, 병조의 축수재를 혁파할 것을 명했다(『태종실록』 14년 1월 3일). 당시 병조에서는 중방(重房)의 전례에 따라서 서보통도감(西普通都監)의 이식(利息) 돈을 사용하여 해마다 축수재를 설치하였다. 이후 태종의 축수재 혁파 명령은 두어 차례 계속된다. 이후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축수재를 행하자 태종은 축수재의 혁파를 명령하였고(『태종실록』 14년 5월 16일), 3년 뒤에 삼도감(三都監)·내시다방(內侍茶房)·상의원(尙衣院)·응양위(鷹揚衛)에 명하여 탄신일의 축수재를 베풀지 말게 하였다(『태종실록』 17년 5월 9일).
세종조에 이르러 영의정유정현은 흥천사에서 왕의 생일에 축수재를 올렸으며(『세종실록』 3년 4월 9일), 세종은 "태조의 원종공신 등은 청량사(淸涼寺)에서, 태종의 원종공신 등은 승가사(僧伽寺)에서, 주상의 탄신 축수재를 설치하소서."라고 하며 축수재를 청하는 원종공신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축수재를 열지 못하게 하였다(『세종실록』 5년 4월 10일).
호불 군주였던 세조 때에는 축수재가 빈번히 열렸지만, 성종대에 이르러 축수재를 혁파하라는 상소가 이어지자 성종은 탄일 축수재를 혁파하였다(『성종실록』 8년 12월 4일). 이후 축수재는 국가적인 의식으로는 설행되지 못했지만 사찰마다 왕과 왕비, 세자의 삼전(三殿) 전패(殿牌)를 모시고 아침저녁 예경과 다라니를 왼 다음 축원하는 형태로 전해졌다.
절차 및 내용
축수재의 절차는 『청문』(1529)의 별축상작법(別祝上作法)이나 『범음산보집』(1723)의 축상작법 등을 통해 그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 별축상작법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주지와 승려 대중이 법당에 들어가 바라를 울린 다음 금강무량수불을 염송하며 법당을 돈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와 "대중은 한 조각 값을 매길 수 없는 향이 온 세계에 널리 향기가 퍼져 이 향으로 전하는 진리를 만나는 이들은 모두 부처를 이루고 주상의 옥체가 항상 편안하고 수명이 만세에 이르지이다." 하는 염향게송을 읽는다. 혹시 혼자 향을 사르게 되었을 때는 "믿음의 손으로 겨우 사르고 우리 왕의 수명을 축원하며, 금지옥엽도 만만대에 이어지고 문무 신하들도 충으로 보좌하고 만민은 항상 편안해지이다."라고 아뢴 다음 "계정혜해지견향~"의 향을 사르는 게송을 읽으며 대중은 "시방불 시방법 시방승"을 염송한다. 시방에 절하는 게송 6구를 염송하고 말구에서 "제가 이제 주상을 위해 수명을 비오니 삼보님이시여, 가호하여 주소서."라고 발원을 한다.
이어 다섯 원불에게 축원을 하는데, 첫째 "무량수불 무량수불이시여, 주상전하의 수명이 만세에 이르지이다."라고 선창하면 대중이 함께 "무량수불"이라고 칭명한다. 둘째, "약사여래 약사여래시여, 왕비전하의 수명이 가지런해지이다." 하면 대중이 함께 "약사여래"라고 칭명한다. 셋째, "석가여래 석가여래시여, 세자저하의 수명이 천년에 이르지이다."라고 하면 대중이 함께 "석가여래"라고 칭명한다. 넷째, "소재장보살 소재장보살이시여, 전쟁이 멎고 나라와 백성이 편안해지이다."라고 하면 대중이 함께 "소재장보살"을 칭명한다. 다섯째, "치성광여래 치성광여래시여, 천하가 태평하여 법륜(불법)이 전해지이다."라고 하면 대중이 함께 "치성광여래불"을 칭명한다.
다음은 "나무광명회상불보살"을 칭명한 후 법당을 도는 기경타주 의식을 행한다. 이어 불설대승성금강무량수불결정광명왕다라니와 광명진언을 21편 염송한다. 다시 "나무광명회상불보살"을 칭명한 후 법당을 돈다. 이어 "금강무량수불인왕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한 후 능엄주를 염송한다. 혹은 "사다도" 하고 바라를 울리고 보통축원을 하여 마친다. 보통축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래 현전 비구대중은 능엄의 비밀주를 외우고 염송한 일체 공덕을 호법의 천룡중과 토지가람 제성중께 회향하오니, 세 가지 재앙과 여덟 가지 어려움이 고통과 함께 떠나고 네 가지 은혜를 입는 삼유의 유정들이 다 입게 되며, 주상전하의 수명은 만세에 이르고, 나라 안이 편안해 전쟁이 소멸되며, 비바람이 순조로워 백성들이 안락해지고 산문이 조용해져 근심이 사라지고, 단월신도 귀의하니 복덕 지혜 늘어나고, 네 가지 시주한 이들의 수명은 늘어나고, 시방의 시주들의 액난이 없어지며, 선망부모님은 극락세계 태어나고 모든 생명 함께 같이 피안에 오르지이다."
이어 "시방삼세불보살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며 축상작법이 끝나게 된다.
축수재는 기본적으로 병조 등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부처에 공양하고 승려에게 재를 올린 공불재승(供佛齋僧) 다음에 행해지는 축수 의식이었다고 한다면 축상작법은 사찰의 승려들에 의해 행해진 축원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세 후반 축수재가 혁파되었지만 축상 의식은 면면히 이어졌다. 현대 불교에서도 권공 의식의 축원에는 "천하가 태평해져 법륜이 굴려지고 나라 안이 만년토록 편안해지기를[天下泰平法輪轉 國界恒安於萬歲]"이라고 하며 국가를 위한 축원이 축원의 첫 자리에 놓여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대송승사략(大宋僧史略)』
- 『지환집(智還集)』
-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
- 보련각 편집부, 『상용불교의범』, 보련각,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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