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일원(安逸院)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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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안일원 |
한글표제 | 안일원 |
한자표제 | 安逸院 |
관련어 | 정업원(淨業院), 자수궁(慈壽宮), 자수원(慈壽院), 비구니원(比丘尼院), 인수원(仁壽院)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서울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탁현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일원(安逸院)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단종실록』 3년 5월 10일, 『연산군일기』 5년 2월 26일, 『중종실록』 12년 8월 20일, 『중종실록』 19년 5월 8일, 『명종실록』 1년 7월 29일, 『현종실록』 2년 2월 12일 |
왕실의 비빈이나 궁녀들이 선왕의 사후에 머무르던 비구니원.
개설
안일원(安逸院)은 원래 고려시대 때 개경에 있던 왕실 비구니 사찰이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창덕궁 인근에 안일원이라는 사찰이 운영되었는데, 정업원(淨業院)과 함께 왕실 비빈들의 기도처로 역할하였다. 조선초기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는 정업원과 안일원을 각각 다른 사찰로 일컫고 있으며, 중기 이후에는 정업원의 이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안일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의 "1383년(고려 우왕 9) 우왕이 안일원으로 갔는데 그곳은 비구니가 사는 절이었다."는 기사이다. 비구니절이라는 설명밖에 없어 사찰의 구체적인 성격은 알 수 없지만, 왕이 행차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왕실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절이라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단종대에 처음으로 안일원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는데, 1455년(단종 3)에 윤사로가 세조에게, 금성대군이 안일원 주지의 족친인 안조술(安祖述)에게 말을 주었다는 내용을 아뢰었다(『단종실록』 3년 5월 10일). 또 1499년(연산군 5)에는 왕이 대궐 뒤로 사람이 왕래하는 것을 금하라는 조치를 내리면서 광지문의 군대 초소를 안일원 북쪽으로 옮기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연산군일기』 5년 2월 26일). 이 기사들을 통해 조선초부터 안일원이라는 사찰이 도성 내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517년(중종 12) 대사헌최숙생이 중종에게 아뢴 내용 가운데 "여승이라는 것은 가장 상서롭지 못한 것인데 아직까지 안일원과 자수궁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로 인한 화가 지금 어찌 없겠습니까. 근래에 여승의 집을 헐고 환속시켰으나 그 뿌리가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중종실록』 12년 8월 20일)라고 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최숙생은 정업원을 철폐시키는 데 앞장선 인물로, 정업원이 폐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도성 내에 왕실 비구니원이 존재하고 있음을 중종에게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전기 안일원은 정업원과 함께 왕실 비구니원으로 기능하던 사찰이었다.
조정 신료들의 항의가 제기된 이후, 안일원 또한 정업원과 마찬가지로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1524년(중종 19) 5월 8일 안일원의 재목과 기와를 사람들이 주워 가져갔다는(『중종실록』 19년 5월 8일) 기사를 통해 1524년에 이미 안일원이 혁파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일원은 정업원과 종종 혼용되었다. 1546년(명종 1) 7월 26일 기사에는 "전날의 정업원 곧 안일원으로, 전날에 여승들이 거처하다가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하고 있어 안일원이 정업원의 다른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또 명종 즉위 후 정업원을 새로 수리하려는 왕실의 결정에 대해 사간원이 그 부당함을 간하는 중에 "정업원은 세속에서 말하는 안일원으로 일찍이 비구니들과 삿된 무리의 소굴이 되었다가, 선왕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축출하고 그 건물을 비워 그대로 폐기된 지 40년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안일원이 세속에서 정업원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명종실록』 1년 7월 29일).
이처럼 안일원과 정업원이 혼동되어 불린 것은 두 사찰이 모두 왕실 비구니원이었던 데다 창덕궁 인근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일원과 정업원은 고려대부터 왕실 여성들이 출가하는 사찰이었기 때문에 두 절이 종종 동일 사찰로 혼동된 것이다.
중종대에 정업원과 안일원이 철폐된 이후 정업원은 명종초 문정왕후에 의해 인수궁 부속 불당으로 중창된 반면 안일원은 재건되지 않았다. 문정왕후에 의해 복설된 정업원 또한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도 정업원과 안일원 소속 비구니들은 여전히 창덕궁 인근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정업원과 안일원 비구니임을 자처했다. 1607년(선조 40) 5월 4일에 사헌부에서는 이교를 엄금할 것 등을 간하면서 "정업원·안일원 등의 옛터는 전일 선왕(先王)의 후궁이 거주하던 별처(別處)로 궁궐에서 아주 가까운 곳인데 지금 여승(女僧)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많이 들어가 집을 짓고 감히 전철을 따르고 있다."며 이를 엄히 다스려 바로잡으라고 요청하였다. 이로 볼 때 안일원을 비롯한 왕실 비구니원의 여승들이 계속 도성 내에 비구니원을 운영하면서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도성에서 완전히 퇴출된 것은 1661년(현종 2)에 이르러서였다. 현종은 왕실 비구니원으로 기능하던 인수원과 자수원을 철폐시키고 여기에 소속된 비구니들은 동대문 밖으로 이주시키거나 환속시켰다(『현종실록』 2년 2월 12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