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승(出身僧)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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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출신승 |
한글표제 | 출신승 |
한자표제 | 出身僧 |
관련어 | 승과(僧科), 대선(大選), 중덕(中德), 법계(法階), 승직(僧職), 선교양종(禪敎兩宗), 양종판사(兩宗判事)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출신승(出身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7년 4월 28일 |
조선시대에 승과에 합격한 승려.
개설
승과(僧科)는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의 승과 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따랐다. 세종 연간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하여 승려의 시험 과목을 정하였다. 교학(敎學)과 참선(參禪)을 배운 자 중에서 시험을 치르게 한 뒤, 선종과 교종의 구별 없이 법계(法階)를 주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의 승과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종대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선종과 교종에서 3년마다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선종은 『전등록(傳燈錄)』·『염송집(拈頌集)』을, 교종은 『화엄경(華嚴經)』 및 『십지론(十地論)』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초시에서 교학(敎學)에 밝은 자를 갑·을·병 세 등급으로 나누어 뽑고 대선(大選)이라는 법계를 주었다. 복시에서 다시 시문이나 글을 짓는 제술(製述)을 통해 선을 참구(參究)한 자를 뽑아 중덕(中德)이라 하였다. 이처럼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를 구분하여 강경과 제술을 시험한 것은 문과와 무과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후 선종에서는 선사·대선사로, 교종에서는 대덕·대사로 법계가 올라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성종대에는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이미 승려가 된 사람도 환속시켰으므로 승과 또한 중지되었다. 연산군대에 잠시 승과가 재개되었다가 1505년(연산군 11)에 다시 폐지되었다.
승과는 문정왕후의 호불 정책의 일환으로 1550년(명종 5)에 부활되어, 1552년(명종 7)부터 초시(初試)가 실시되었다. 승과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覆試)가 시행되었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강경(講經)과 제술을 시험하여 도첩(度牒)을 주었는데, 이것은 문과와 무과를 모방한 것이었다. 1552년에 승정원에서 승과 합격자의 등수 구분이 『경국대전』에도 없음을 아뢰자, 명종은 등수를 나눌 것을 명하였다. 또한 승과에 합격한 출신승(出身僧)을 주지에 임명하면 잡승(雜僧)이 자연적으로 없어질 것이라며, 각 사찰의 주지는 출신승 중에서 뽑도록 하였다(『명종실록』 7년 4월 28일). 이에 앞서 명종은 선교 양종을 시험 볼 때 예관(禮官)에게만 제공되던 늠료(廩料)를 양종의 판사(判事)와 출신승에게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정릉지(靖陵誌)』
- 김영태, 『한국불교사개설』, 경서원, 1986.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김영태, 「불교」, 『한국사』26 조선초기의 문화Ⅰ, 국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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