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승(驛子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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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에 소속되어 각종 역(役)을 담당한 승려.

개설

역참에서 공문 전달, 공무 여행, 관물 수송 등의 소임을 맡았던 승려이다. 고려시대 사찰 기능을 하고 있던 원이, 조선초기에 여관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원에 소속돼 있던 승려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교통 통신 기관인 역에는 역자(驛子)를 배치하여 공문의 전달, 공무 여행, 관물 수송 등에 역마를 제공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전국 41개 역로(驛路)에 537개 역이 설치되었으며, 이들 역은 찰방(察訪)·역승(驛丞)이 관장하였다. 또 역마 이용자에게 중앙에서는 상서원(尙瑞院)이, 지방에서는 감사와 병사·수사가 마패(馬牌)를 발급하였는데, 이 마패에는 관원의 등급에 따라 마필의 수효가 새겨져 있었다. 역참에는 역원(驛院)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소속된 역자승(驛子僧)들은 각종 역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원은 사찰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원 또한 승려들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초기에 교통 체계가 재편되면서 원은 대부분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여관으로 변모했다. 조선초기의 역자승은 사찰의 기능을 하고 있던 원이 여관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원에 소속돼 있던 승려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역자승은 역참에 소속되어 공문의 전달, 공무 여행, 관물 수송의 소임을 맡았던 승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에 1,310개소의 원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공무 여행자의 숙식은 대개 객사(客舍)나 민간업자에 의해 대행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원은 없어지고 원이 있었던 터에 간단한 음식과 술을 파는 주점과 주막이 발달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강원도의 고성(高城)임내(任內) 안창현(安昌縣)의 초막(草幕)에 사는 이각(伊覺)과 역자승 홍민(洪憫)이 사재감 소속의 노승(奴僧)신철(信哲)과 만나 지금의 왕 때문에 흉년이 들어 살기가 몹시 어려우니 자신이 왕이 된다면 나라에 반드시 풍년이 들 것이라고 말하고 다닌 일이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의금부의 보고를 받은 왕은 홍민과 신철을 각기 본래 맡았던 역(役)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5년 3월 5일).

참고문헌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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