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패(馬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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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무로 지방에 출장 가는 관원이 역마를 사용하기 위해 지급받았던 증표.

개설

마패(馬牌)는 조선시대에 공무(公務)로 지방에 출장 가는 관원들이 역마(驛馬)를 사용하기 위해 지급받던 증표였다. 삼국시대에도 외방에 역로(驛路)가 설치되었으나 말을 타기 위해 마패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사용을 추측할 수 있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에서는 마패에 대한 규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제작하였으나 사용하기 불편하여 구리로 바꾸었다. 자세한 규정은 『경국대전』에 실리면서 확립되었고, 이후 일부가 보완되거나 변경되었다.

연원 및 변천

역(驛)을 설치하고 말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역제(驛制)는 삼국시대부터 운용되었다. 다만 역의 말[馬] 사용 규정 제도는 고려에 들어와, 특히 원 간섭기에 이르러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1274년(고려 원종 15)에는 지방에 가는 재추(宰樞)에게 말 10필을 지급하라는 등의 내용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이때부터 마패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도 마패를 사용했을지 모르나 확인되지 않는다.

마패는 조선에 들어와 한층 정비되었다. 1410년(태종 10) 4월에는 역마를 사용하는 제도를 정하였다. 본래 의정부에서 병조(兵曹)이문(移文)을 보내면 병조에서 기마문자(騎馬文字)를 주고, 출장 가는 사람이 승정원에서 마패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긴급한 일이 생기면 입직한 대언(代言)이 친히 왕지(王旨)를 품하여 병조에 내려 처리하도록 했다. 아울러 당시 새로 제작한 마패에는 이전에 마패 발급을 담당하였던 공역서(供譯署)의 관인 대신 병조의 관인을 사용하도록 했다(『태종실록』 10년 4월 5일). 1414년에는 모든 높고 낮은 관원부터 기마역자(騎馬驛子)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에게 아뢴 뒤에 마패를 주도록 하여 관리를 보다 엄격하게 했다(『태종실록』 14년 2월 12일).

1434년(세종 16) 병조가 “그동안 마패를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주 상하고 쪼개진다.”라고 한 건의에 따라 철로 만들게 하였다. 크기와 두께는 순패(巡牌)보다 약간 작게 하고 제작 시기, 인적(印迹)과 자호(字號)는 나무패의 예에 의해 시행하도록 했다(『세종실록』 16년 2월 25일). 이듬해 새로 제작한 철 마패를 관찰사 등에게 나눠 주고 이전 목마패(木馬牌)는 회수했다(『세종실록』 17년 10월 28일). 그 후 병조 대신 상서사(尙瑞司)가 그 출납을 관리하게 하였다(『세조실록』 5년 3월 24일).

그 뒤 마패에 관한 사항은 『경국대전』에 정리되었다. 먼저 왕명으로 나가는 관원에게 병조에서 그 등수(等數)에 따라 증서[帖]를 내주고 상서원에서 왕에게 아뢴 뒤 지급하도록 했다. 마패는 관찰사와 절도사에게도 지급하였는데 이들이 왕에게 보고할 일이 있거나 진상할 경우에 사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반납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문제가 되었다. 이에 『속대전』의 규정을 통해 보강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거나[復命]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는 즉시 반납하도록 했다. 일단 외방으로 말을 주어 내려보낸 관원이 임지에 도착하면 관찰사와 절도사는 마패를 검사하고 봉한[監封] 다음에 서울로 올려 보내어 상서원에 도착하도록 해야 하며, 만약 기한 내에 보내지 않은 경우에는 받아 간 사람을 무겁게 추고하였다[重推]. 마패를 분실하면 분실에 해당하는 죄[本罪]보다 무겁게 처벌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많은 마패가 유실되었기에 1601년(선조 34)에 새로 만들었다. 1621년(광해군 13)에는 병조에서 명나라의 천계(天啓) 연호로 고쳐서 제작할 것을 요청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2월 13일). 그런데 이것이 병자호란이 지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1730년(영조 6)에 청나라에 흘러들어가 문제가 되었다(『영조실록』 6년 6월 12일). 이에 서둘러 청나라의 옹정(雍正) 연호를 넣어 마패를 제작하였다(『영조실록』 6년 6월 13일).

형태

『경국대전』에 의하면 마패는 구리로 만든 둥근 모양이며, 한 면에는 품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그려 넣었고, 다른 한 면에는 천자문(千字文)으로 된 자호와 연월(年月)을 썼으며 또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네 글자의 전인(篆印)을 새겼다. 1434년에 철재로 바꾼다는 기록이 있어서 나무에서 철로 교체했다가 다시 구리로 되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은 구리로 된 것들이며 지름은 9.4~9.8㎝, 두께는 0.5~0.8㎝ 사이다.

궁중에서는 특별히 종이로 만든 지패(紙牌)와 나무로 만든 목패(木牌)를 사용하였다. 구리로 만든 것이 무겁고 사용하기 불편했기 때문에 궁중에서는 간편하게 종이나 나무로 만든 것을 쓰기도 했다. 지패의 경우 1745년(영조 21) 당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사복시(司僕寺)에서 마패로 쓰는 지패에 정해진 숫자가 없으며, 내사복시(內司僕寺)에도 두고 사용하여 폐단이 우려된다.”고 하였듯이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환관 가운데 청렴하고 일을 아는 자를 뽑아 지패 관련 업무를 주관하게 할 것이 건의되었다(『영조실록』 21년 1월 22일).

한편 『대전통편』에 의하면 목마패는 모양이 둥글고 한 면에는 마자(馬字)를 전자(篆字)로 써서 각인(烙印)하고 다른 한 면에는 일마(一馬)부터 오마(五馬)까지를 표시하여 짐을 싣는 태마(駄馬)를 청구하게 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목마패는 산유자(山秞子) 나무로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나무가 단단하고 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마패와 관련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출두했을 때 그의 상징물처럼 마패를 앞장세워 제시했다는 것이다. 암행어사가 마패를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마패는 암행어사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반드시 그것만으로 신분을 확인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소설이나 영화, 텔레비전 등의 드라마에서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듯하다.

마패는 말의 수에 따라 1마패부터 5마패까지 있었는데, 그중 암행어사에게는 3마패를 지급하도록 『속대전』에 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로 2마패를 받았다. 이때 마패는 신분증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관인(官印)으로 대용되기도 했다. 가령 불법을 저지른 단서가 포착되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兵符)를 압수하고 ‘봉고(封庫)’ 두 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해 창고의 문을 봉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 관부에 청원이나 진정을 위해 제출했던 소지(所志) 등에 암행어사가 처분을 내리면서 마패로 날인하는 사례가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이로 인한 영향 탓인지 일부 민간에서는 마패를 부귀영화의 상징물로 여겨 소중하게 여기는 풍습이 생기기도 하였다. 최근까지도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의 부모가 마패를 손으로 만지면서 합격을 기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마사박물관, 『마사박물관지 2003』, 마사박물관, 2003.
  • 전봉덕, 『한국법제사연구: 암행어사 연구 기타』, 서울대학교출판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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