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견산성(岳堅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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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주변 지역 방비 및 백성 보호를 목적으로 경상도 삼가현악견산에 축조한 산성.

개설

악견산성은 기록에 의하면 1439년(세종 21)에 수축되었으나, 임진왜란 기간에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본격적으로 축조·관리되었다. 인근에 위치한 지리산의 귀성산성(龜城山城), 가야산의 용기산성(龍起山城) 등과 함께 영남 내륙지방을 지키고 그곳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데, 성벽의 높이는 2.7m 정도이고, 산꼭대기의 평탄한 지역에 건물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성곽 축성 방식으로 쌓은 산성으로 이 분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는 유적이다.

위치 및 용도

악견산성이 위치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은 경상도 내륙지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남쪽으로는 의령현(宜寧縣), 서쪽으로는 단성현(丹城縣), 북쪽으로는 합천군(陜川郡)과 접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지리산과 가야산 자락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이러한 위치적 특성을 군사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기간에 왜군이 영남 내륙지방으로 대거 들어옴에 따라 군사적으로 중요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지방 방어체제가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는 입보(入保) 방식으로 변화함에 따라, 영남 내륙지방에 산성이 활발하게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가의 악견산성 이외에도 합천(陜川)의 이숭산성(李崇山城), 가야산(伽倻山)의 용기산성, 지리산(智異山)의 귀성산성( 등이 축조되었다(『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산성의 주 용도는 삼가 지역 주변 방어와 지역 주민의 피난처였다. 한편 이 시기, 이 지역에 산성을 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삼가현과 이웃한 의령에서 활동한 의병장 곽재우의 존재도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선조실록』 26년 12월 21일).

변천 및 현황

악견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악견산석성(岳堅山石城)’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록되고 있으며,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1439년(세종 21)에 수축되었다고 한다. 또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도 악견산성의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조선전기에 수축되었으며 그 이후로 삼가 지역 주변을 방비하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문헌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다가, 임진왜란의 와중에 경상도의 군대를 위무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교리(校理)권협(權悏)이 총섭장(總攝將) 유정(惟政)으로 하여금 승도(僧徒)를 모아 악견산성을 수축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여 비로소 다시 산성으로서 활용되었다(『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이에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던 곽재우가 도체찰사(都體察使)류성룡의 명령을 받아 보수하고 이용하였다고 한다.

산성이 다시 축조된 이후에는 비변사의 요청에 따라 성안에 창고를 설치하여 그 안에 관곡(官穀)을 저장하고, 주변에 사는 백성들의 피난처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8년 8월 5일). 이러한 대비가 이루어진 까닭에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였을 때, 경상우병사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악견산성을 지키도록 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악견산성장(岳堅山城將)이정(李瀞) 등이 왜군과 싸워 전공을 올리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10일).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문헌상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국가 입장에서의 군사적 필요성은 상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1757년(영조 30)에 만들어진 『여지도서』에는 산성의 규모와 재질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형태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합천악견산성(陜川岳堅山城)’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기념물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형태

합천읍에서 남서쪽으로 15㎞ 지점에 솟은 악견산(491m) 꼭대기의 바위를 연결하여 자연석으로 쌓은 성으로,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산꼭대기 부분을 빙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기단부는 산에 의지하여 돌을 채우는 산탁(山托) 공법을 쓰고, 윗부분은 양쪽 벽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夾築) 공법을 써서 쌓았는데 윗부분은 일부 무너졌다. 보존이 잘된 곳의 석축은 높이 2.7m 정도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산성 축조 기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산꼭대기의 평지에는 건물터가 남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전하는 이야기로는, 왜군이 장기전을 펴자 곽재우가 인근 금성산(錦城山) 바위에 구멍을 뚫고 악견산까지 줄을 맨 뒤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달밤에 띄우게 하여, 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문헌상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악견산성을 비롯한 그 주변의 여러 산성의 축조에 곽재우가 깊이 관여하였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 『난중잡록(亂中雜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나경준, 「조선 숙종대 관방시설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황부연, 「조선후기 산성 수축과 운영의 재정구조」,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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