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천(梵天)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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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범천 |
한글표제 | 범천 |
한자표제 | 梵天 |
동의어 | 대범천(大梵天), 범왕(梵王), 범천왕(梵天王), |
관련어 | 나한전(羅漢殿), 브라흐마(Brahmā), 석굴암(石窟庵), 신중도(神衆圖), 응진전(應眞殿), 제석천(帝釋天), 초선천(初禪天)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탁현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범천(梵天) |
제석천(帝釋天)과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
개설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 인도의 힌두교에서 비슈누, 시바와 함께 3대 신 중의 하나로 존중받았던 신이다. 제석천과 같이 초창기 불교에서부터 수용되어 석가모니의 전기(傳記)에도 자주 등장하며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감화되어 불법을 지키는 호법수호신(護法守護神)이 되었다.
범천(梵天)은 석가모니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신들을 총칭하는 신중(神衆)들 가운데 모든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중도(神衆圖)의 중요 도상이다.
연원
범천은 산스크리트어의 브라흐마(Brahmā)의 음역으로 본래 인도의 브라흐만[梵]에서 유래하였다. 브라흐마는 힌두교에서 우주의 통일적 최고 원리인 브라흐만이 인격화(人格化)되면서 우주를 창조한 최고의 남성신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의 다른 신인 시바와 비슈누에 대한 신앙만큼 유행하지 않으면서 지위가 내려갔고 불교로 수용되었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3단계로 나누어 삼계(三戒)로 규정하는데 삼계는 탐욕이 들끓는 욕계(欲界)와 탐욕에서 막 벗어난 색계(色界),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색계(無色界)로 나뉜다. 색계에 속하는 4가지 천(天) 중 초선천(初禪天)의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 3가지가 모두 범천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범천은 항상 제석천과 짝을 이루며 불교를 옹호하는 신으로 묘사되었다. 석가모니가 성도 후 법열(法悅)에 빠져 있을 때 설법해줄 것을 권유한 것이 범천이었다. 범천과 제석천은 석가모니의 불법을 찬양하고 수호하는 역할로 일찍부터 불경(佛經)에 등장하였다. 시대가 갈수록 불법 수호 기능이 호국(護國)으로 확대되면서 호국 신중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카니시카대왕의 사리 용기와 같은 초기 불상 조각에서부터 도상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석가모니를 협시하는 삼존불처럼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신중도 같은 불화에서 항상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시대 이전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신중신앙이 전래되어 조각과 회화 등으로 조성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탑상(塔像)」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수로왕의 밀양 만어사(萬魚寺) 창건 설화로 연못에 살던 독룡 1마리와 5명의 불교 악귀인 나찰(羅刹)이 악행을 일삼자 범천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청하여 오계(五戒)를 받게 한 것이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면서 여러 종류의 불상과 함께 범천을 봉안하였다.
경주 석굴암(石窟庵)에 있는 범천상은 조형미가 뛰어난 조각상으로 왼팔에 호리병 모양의 정병을 들고 오른팔엔 불자(拂子)를 든 형태로 표현되었다. 통일신라후기와 고려초기까지 범천상은 주로 제석천상과 함께 3층 석탑의 1층 탑신, 승탑의 탑신 표면에 새겨져 수호의 역할을 하였다. 이 상들은 8세기 중반 이후 중국 당(唐)에서 전래된 높은 보관을 쓰고 소매가 긴 가사를 입은 형태이다. 고려시대 범천을 그린 회화로는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범천도」 벽화가 있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이나 극락전(極樂殿)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 안에 신중도가 봉안되었다. 신중은 경전에 나오는 다양한 신중의 수만큼이나 그 종류가 다양한데 범천과 제석천은 신중도의 주존이 되어 여러 권속들과 함께 등장하였다. 범천은 제석·범천·천룡도, 제석·범천·마혜수라·천룡도의 구성으로 그려졌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신중도에 범천과 제석천은 제왕이나 보살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범천은 오른손에는 연꽃과 영묘한 구슬[寶珠]을 들고 왼손에는 정병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제작된 해남의 대흥사(大興寺) 「범천도」는 제석도와 함께 제작되어 대양문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현존하는 신중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조선시대 범천도 도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각상으로 제작되어 응진전(應眞殿)이나 나한전(羅漢殿) 등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제작된 전라남도 순천송광사(松廣寺) 응진당(應眞堂)의 소조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김정희, 『불화, 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돌베개, 2009,
- 정병삼, 『그림으로 보는 불교이야기』, 풀빛, 2000.
- 허형욱, 「석굴암 범천·제석천상 도상의 기원과 성립」, 『미술사학연구』 246·247, 한국미술사학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