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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정책|대표표제=시경도목|한글표제=시경도목|한자표제=試經都目|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시경(試經), 심경(心經), 금강경(金剛經), 살달타(薩怛陁), 경국대전(經國大典), 도승(度僧), 도첩(度牒), 승과(僧科), 선시(選試), 양종(兩宗), 사도승(私度僧)|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법제·정책|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강호선|시행시기=|시행기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03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1008_001 『명종실록』 7년 1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12_002 『명종실록』 7년 4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10016_002 『명종실록』 7년 10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8017_003 『명종실록』 7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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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의 인적 사항과 시험 결과 등을 기록한 문서.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의 인적 사항과 시험 결과 등을 기록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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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대부터 시행된 도첩제는 출가하기 전에, 군역을 면제 받는 대가로 관청에 포(布)를 납부해야만 공식적으로 출가를 인정받고 신분증명서인 도첩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도첩제를 시행한 이유는 국가가 출가자의 수를 통제함으로써 [[국역(國役)]]을 담당하고 세금을 납부할 양인을 확보하려는 목적과, 무분별한 출가를 막아 승려들의 자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고려 공민왕대부터 시행된 도첩제는 출가하기 전에, 군역을 면제 받는 대가로 관청에 포(布)를 납부해야만 공식적으로 출가를 인정받고 신분증명서인 도첩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도첩제를 시행한 이유는 국가가 출가자의 수를 통제함으로써 [[국역(國役)]]을 담당하고 세금을 납부할 양인을 확보하려는 목적과, 무분별한 출가를 막아 승려들의 자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도첩제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계속되었는데, 『경국대전』「[[도승(度僧)]]」조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출가하려는 사람은 3달 이내에 선종이나 교종에 신고한 뒤, 그 본사(本寺)에서 송경(誦經) 즉 불경을 외우는 시험을 치렀다. 선종 또는 교종의 본사에서 시험 결과를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그 뒤 출가자가 군역을 면제 받는 대가로 [[정전(丁錢)]]을 납부하면 비로소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송경 과목은 『심경(心經)』, 『금강경(金剛經)』, 『살달타(薩怛陁)』 등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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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첩제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계속되었는데, 『경국대전』「[[도승(度僧)]]」조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출가하려는 사람은 3달 이내에 선종이나 교종에 신고한 뒤, 그 본사(本寺)에서 송경(誦經) 즉 불경을 외우는 시험을 치렀다. 선종 또는 교종의 본사에서 시험 결과를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그 뒤 출가자가 군역을 면제 받는 대가로 [[정전(丁錢)]]을 납부하면 비로소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송경 과목은 『심경(心經)』, 『금강경(金剛經)』, 『살달타(薩怛陁)』 등이었다고 한다.
  
 
=='''내용 및 변천'''==
 
=='''내용 및 변천'''==
  
시경(試經)이란 말 그대로 경전[經] 즉 불교 경전을 시험한다는[試] 뜻이다. 도목(都目)은 이름 등을 기록한 일종의 장부로, 도목장(都目狀)이라고도 한다. 도목은 고려시대 이래 고과 성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원들의 인사 행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에도 관원들에 대한 도목이 이루어졌다. 또한 도목 또는 도목장은 관청에 소속된 노비나 군인의 명단, 지방 공천(公賤)의 명단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시경도목은 불경을 외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일종의 명단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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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試經)이란 말 그대로 경전[經] 즉 불교 경전을 시험한다는[試] 뜻이다. 도목(都目)은 이름 등을 기록한 일종의 장부로, 도목장(都目狀)이라고도 한다. 도목은 고려시대 이래 고과 성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원들의 인사 행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에도 관원들에 대한 도목이 이루어졌다. 또한 도목 또는 도목장은 관청에 소속된 노비나 군인의 명단, 지방 공천(公賤)의 명단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시경도목은 불경을 외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일종의 명단으로 볼 수 있다.
  
 
도첩을 발급하기 전에 불교 경전에 대한 시험을 치르도록 한 것은 중국 당나라에서 시행된 시경도승(試經度僧) 제도와 유사하다. 당나라에서도 도첩 발급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시험을 두어, 사도승(私度僧)을 단속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한편 승려로서의 기본 자격을 시험하여 승려의 질을 관리하려 하였다.
 
도첩을 발급하기 전에 불교 경전에 대한 시험을 치르도록 한 것은 중국 당나라에서 시행된 시경도승(試經度僧) 제도와 유사하다. 당나라에서도 도첩 발급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시험을 두어, 사도승(私度僧)을 단속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한편 승려로서의 기본 자격을 시험하여 승려의 질을 관리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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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국대전』에 규정된 시경은 도첩을 발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승계(僧階)와 [[승직(僧職)]]을 얻기 위한 [[선시(選試)]] 즉 승과(僧科)와는 무관하였다. 성종대까지도 시경은 도첩 발급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불교 교단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에 『경국대전』에서 「도승」조가 삭제되면서 시경은 폐지되었다. 이는 도첩제가 폐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국가에서 더 이상 출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원래 『경국대전』에 규정된 시경은 도첩을 발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승계(僧階)와 [[승직(僧職)]]을 얻기 위한 [[선시(選試)]] 즉 승과(僧科)와는 무관하였다. 성종대까지도 시경은 도첩 발급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불교 교단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에 『경국대전』에서 「도승」조가 삭제되면서 시경은 폐지되었다. 이는 도첩제가 폐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국가에서 더 이상 출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1550년(명종 5)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이 재건되고 『경국대전』의 이전 조항에 의거해 도첩제와 승과가 부활하면서 시경도 다시 시행되었다. 다만 연산군대 이전까지는 시경과 승과가 분명히 구분된 데 비해, 명종대에는 양자의 구분이 모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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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550년(명종 5)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이 재건되고 『경국대전』의 이전 조항에 의거해 도첩제와 승과가 부활하면서 시경도 다시 시행되었다. 다만 연산군대 이전까지는 시경과 승과가 분명히 구분된 데 비해, 명종대에는 양자의 구분이 모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과 부활 이후 처음 거행된 시험에서는 선종에서 400여 명을 선발하여 도첩을 발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1008_001 『명종실록』 7년 1월 8일]). 1552년(명종 7) 4월에는 예조에서 봉선사와 봉은사에 관원을 파견해 승려들에게 경전을 시험하게 하여 선종 21명, 교종 12명을 합격시켰다. 명종은 예조에서 시험을 지나치게 엄격히 관리하는 바람에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며, 도첩을 지급하는 본래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12_002 『명종실록』 7년 4월 12일]). 이러한 모습은 이미 시경을 승과와 구분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명종은 시경하는 승려들의 숫자를 정해 놓지 않으면 너무 많이 뽑게 될 것이니 정한 액수(額數) 외에 지나치게 뽑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액수는 평안도·함경도는 각 100명, 전라도·경상도는 각 500명, 황해도·청홍도는 각 400명, 경기·강원도는 각 300명, 도합 2,600명이었는데, 이를 양종으로 나누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10016_002 『명종실록』 7년 10월 16일]).
 
승과 부활 이후 처음 거행된 시험에서는 선종에서 400여 명을 선발하여 도첩을 발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1008_001 『명종실록』 7년 1월 8일]). 1552년(명종 7) 4월에는 예조에서 봉선사와 봉은사에 관원을 파견해 승려들에게 경전을 시험하게 하여 선종 21명, 교종 12명을 합격시켰다. 명종은 예조에서 시험을 지나치게 엄격히 관리하는 바람에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며, 도첩을 지급하는 본래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12_002 『명종실록』 7년 4월 12일]). 이러한 모습은 이미 시경을 승과와 구분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명종은 시경하는 승려들의 숫자를 정해 놓지 않으면 너무 많이 뽑게 될 것이니 정한 액수(額數) 외에 지나치게 뽑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액수는 평안도·함경도는 각 100명, 전라도·경상도는 각 500명, 황해도·청홍도는 각 400명, 경기·강원도는 각 300명, 도합 2,600명이었는데, 이를 양종으로 나누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10016_002 『명종실록』 7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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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0일 (화) 14:35 기준 최신판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의 인적 사항과 시험 결과 등을 기록한 문서.

개설

고려시대 말기 이래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 주는 일종의 신분증명서인 도첩을 발급 받아야 했다. 그 절차에는 경전을 암송하는 시험이 포함되었다. 시경도목(試經都目)은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공민왕대부터 시행된 도첩제는 출가하기 전에, 군역을 면제 받는 대가로 관청에 포(布)를 납부해야만 공식적으로 출가를 인정받고 신분증명서인 도첩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도첩제를 시행한 이유는 국가가 출가자의 수를 통제함으로써 국역(國役)을 담당하고 세금을 납부할 양인을 확보하려는 목적과, 무분별한 출가를 막아 승려들의 자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도첩제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계속되었는데, 『경국대전』「도승(度僧)」조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출가하려는 사람은 3달 이내에 선종이나 교종에 신고한 뒤, 그 본사(本寺)에서 송경(誦經) 즉 불경을 외우는 시험을 치렀다. 선종 또는 교종의 본사에서 시험 결과를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그 뒤 출가자가 군역을 면제 받는 대가로 정전(丁錢)을 납부하면 비로소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송경 과목은 『심경(心經)』, 『금강경(金剛經)』, 『살달타(薩怛陁)』 등이었다고 한다.

내용 및 변천

시경(試經)이란 말 그대로 경전[經] 즉 불교 경전을 시험한다는[試] 뜻이다. 도목(都目)은 이름 등을 기록한 일종의 장부로, 도목장(都目狀)이라고도 한다. 도목은 고려시대 이래 고과 성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관원들의 인사 행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에도 관원들에 대한 도목이 이루어졌다. 또한 도목 또는 도목장은 관청에 소속된 노비나 군인의 명단, 지방 공천(公賤)의 명단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시경도목은 불경을 외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일종의 명단으로 볼 수 있다.

도첩을 발급하기 전에 불교 경전에 대한 시험을 치르도록 한 것은 중국 당나라에서 시행된 시경도승(試經度僧) 제도와 유사하다. 당나라에서도 도첩 발급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시험을 두어, 사도승(私度僧)을 단속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한편 승려로서의 기본 자격을 시험하여 승려의 질을 관리하려 하였다.

원래 『경국대전』에 규정된 시경은 도첩을 발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승계(僧階)와 승직(僧職)을 얻기 위한 선시(選試) 즉 승과(僧科)와는 무관하였다. 성종대까지도 시경은 도첩 발급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불교 교단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에 『경국대전』에서 「도승」조가 삭제되면서 시경은 폐지되었다. 이는 도첩제가 폐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국가에서 더 이상 출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1550년(명종 5)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이 재건되고 『경국대전』의 이전 조항에 의거해 도첩제와 승과가 부활하면서 시경도 다시 시행되었다. 다만 연산군대 이전까지는 시경과 승과가 분명히 구분된 데 비해, 명종대에는 양자의 구분이 모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과 부활 이후 처음 거행된 시험에서는 선종에서 400여 명을 선발하여 도첩을 발급하였다(『명종실록』 7년 1월 8일). 1552년(명종 7) 4월에는 예조에서 봉선사와 봉은사에 관원을 파견해 승려들에게 경전을 시험하게 하여 선종 21명, 교종 12명을 합격시켰다. 명종은 예조에서 시험을 지나치게 엄격히 관리하는 바람에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며, 도첩을 지급하는 본래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명종실록』 7년 4월 12일). 이러한 모습은 이미 시경을 승과와 구분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명종은 시경하는 승려들의 숫자를 정해 놓지 않으면 너무 많이 뽑게 될 것이니 정한 액수(額數) 외에 지나치게 뽑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액수는 평안도·함경도는 각 100명, 전라도·경상도는 각 500명, 황해도·청홍도는 각 400명, 경기·강원도는 각 300명, 도합 2,600명이었는데, 이를 양종으로 나누었다(『명종실록』 7년 10월 16일).

한편 『명종실록』에는 예조에서 왕에게 도첩 발급 상황을 아뢰면서, 시경에 합격한 자들 가운데 도목에 기록된 내용과 이조(二祖) 즉 조부와 외조부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 승명(僧名), 속명(俗名) 등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처결할지 물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명종실록』 7년 8월 17일). 이로 미루어 도목에는 시경에 응시한 사람들의 인적 사항이 함께 기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鎌田茂雄, 『中國佛敎 5-隋唐の佛敎(上)』, 東京大學出版會,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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