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四衆)"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
36번째 줄: | 36번째 줄: | ||
=='''관계망'''== | =='''관계망'''== |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308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3085"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
+ | |||
+ | {{불교}} | ||
+ | |||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
2018년 1월 30일 (화) 13: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사중 |
한글표제 | 사중 |
한자표제 | 四衆 |
동의어 | 사배(四輩), 사부(四部), 사부대중(四部大衆) |
관련어 | 승려(僧侶), 거사(居士),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불교(佛敎)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중(四衆)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0년 7월 22일 |
사부대중의 줄임말로,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네 무리인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사중(四衆)은 부처의 네 종류의 제자를 일컫는 말로,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가리킨다. 비구와 비구니는 산스크리트어의 ‘bhiksu’, ‘bhikkhuni’에서 유래하였는데, 각각 출가한 남자와 여자를 지칭한다. 우바새와 우바이는 출가하지 않은 재가(在家)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각각 가리키는 말로, 달리는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라고도 한다. ‘청신(淸信)’이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깨끗한 믿음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를 세분하여 칠중으로도 구분하는데,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 우바새, 우바이가 여기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사중이 또 다른 의미로도 쓰이는데, 불교 법회에 참석하는 네 부류의 사람을 지칭할 때에도 사중이라고 부른다. 발기중(發起衆), 당기중(當機衆), 영향중(影響衆), 결연중(結緣衆)이 그것이다. 발기중은 법회에서 대중문답 등을 통하여 설법이 이루어지게 하는 무리이며, 당기중은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어 득도하는 무리이다. 영향중은 다른 세계에서 와서 부처의 교화를 돕는 무리이며, 결연중은 법회에 참석하여 장차 깨달음의 인연을 만드는 무리이다.
내용 및 특징
불교 교단은 대개 출가자 남녀와 재가 신자 남녀들, 즉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었다. 한국의 불교 교단 또한 전통적으로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었다.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이들을 네 부류로 분류한 것은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가 수행에 전념하는 동안 이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고 이들을 통해 불법의 진리를 체득하는 재가 신도들이 합심할 때 비로소 교단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교단은 재가 신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유지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면 재가 신도들의 활동을 법적으로 막음으로써 사부대중에 의한 사찰 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의 유학자 관료들은 유교 이념을 표방하고 민간에까지 그 사상과 실천 윤리를 유포시키기 위해 불교를 탄압하고 억제하려 하였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불교를 억제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지속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1448년(세종 30)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김반(金泮)은 당시 궁궐 북쪽에 불당을 세운다는 말을 듣고 상소문을 올려, 군신과 부자의 도리를 논하면서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염두에 두지 않는 불교를 숭신하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의 황제들이 부처를 믿어 왕조가 단축되었고, 양나라무제(武帝)는 승려들이 입는 옷을 입고 사중이 되어 법회를 베풀고 불교 경전을 강의했지만 고통스럽게 죽었음을 사례로 들어 불교 숭배가 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22일).
조선시대에는 자연히 불교 교단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구성원인 출가 수행자나 재가 신자 등의 존재를 배척하였다. 승려 인구를 적극적으로 억제하고, 불공을 드리기 위해 절을 찾는 부녀자들의 출입을 강하게 단속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또한 교화를 위해 승려들이 저잣거리로 나서면 백성들을 미혹하게 만들고 속인다고 하여 도성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건국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인과응보설을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하여, 극락과 지옥을 부정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불교 배척의 논리는 탄압으로 이어져 불교 교단이 존립할 수 없는 상황으로 연결되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는 사찰이 산속으로 쫓겨나고,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자로 구성된 불교 교단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승려를 부역에 동원하거나 환속시키는 조치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출가 승려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외호해야 할 재가자 집단이 미약해짐에 따라 승려들은 스스로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탁발을 통해 보시금을 마련하는 승려들과 사찰 내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사찰은 사부대중이 아닌 승려들의 주도하에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불씨잡변(佛氏雜辨)』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한기선, 「조선조 세종의 억불과 신불에 대한 연구」, 『홍익사학』3, 홍익사학회, 1986.
- 한우근, 「여말선초의 불교정책」, 『서울대학교논문집』6, 서울대학교, 1957.
- 한우근, 「세종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진단학보』25·26·27, 진단학회, 196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