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 인완(仁完)스님은 1930년 9월 21일 경북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에서 아버지 오개수와 어머니 박경식의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이름은 오충자이다. 인완(仁完)스님은 6세 때인 1935년 10월 30일, 김천 청암사에 입산하여 혜옥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교육
1942년 2월에는 김천시 증산면 심상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3년에는 청암사에서 행자 사미니과 교육을 3년간 받았다.
인완스님은 1946년 4월 15일 청암사에서 구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1949년 3월에 능인학원에 입학하여 1951년 10월에 수료하였고, 1955년 3월 8일 선학원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수행
1947년 1월 15일 청암사 수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48년에는 대구 실달사(유치원)에서 기도정진을 하였다. 1958년에 수도사에서 기도정진을 하였고, 1961년에는 부인사에서 수행했다.
소임
1956년 3월에는 실달사 주지로 취임하여 2년간 소임을 살았다. 이어 1962년 10월에는 경산포교당에서 2년간 원주소임을 맡았다.
1964년 용화사에서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68년 2월에는 대휴사에서 원주소임을 살았다. 1983년 10월 김천 대휴사에서 주지로 취임하여 2000년 1월 30일까지 소임을 다했으며, 그 후 한주(閑主, 한가한 주인)로 물러나 수행정진에 진력했다.
은사 혜옥스님과 대구 실달유치원 개원
은사스님인 혜옥스님은 1948년 대구부인연합회의 초청으로 실달사 주지로 부임하여 대구에 첫 불교계 유치원인 실달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은사 혜옥스님은 3회 유치원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51년부터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지장기도로 정진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법문을 하셨고 인완스님은 그런 은사스님을 도왔다.
그 당시 은사스님을 잘 따라주던 원생들이 아주 귀엽고 대견했었던 기억에 훗날에도 감회에 젖곤 하였다. 스님의 은사인 혜옥스님께서는 새싹불자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인완스님은 그러한 은사스님의 뜻에 부응하면서 7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원생기도와 유치원 보조협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실달사는 유치원뿐 아니라 일요일마다 아동법회를 열었으니 오늘날 어린이법회의 효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구 실달사에서 은사 혜옥스님이 법회 도중 방광하시다
실달유치원의 자모회와 실달사 부인연합회, 일반신도 등 불자 200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법좌에 모인 설자說者와 청자 聽者는 일심동체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은사 혜옥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혜옥스님께서 법문에 앞서 이 게송을 하시는 순간, 갑자기 세 차례나 방광을 하였다. 폭염의 더위마저 극락정토로 변하는 이적에 감읍하여 대중의 환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대중은 더욱 환희심을 내어 청문정진에 한사람도 빠짐없이 끝가지 회향을 잘하였다.
인완스님의 손상좌 수정스님이 본 인완 노스님
손상좌 불교학 박사 수정스님은 “요즘 세상에 인완 노스님 같은 스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 노스님이 수행하던 것을 떠올리면 과연 어디 또 그런 스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행하셨던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수정스님에 따르면 인완스님은 얼굴이 맑고 깨끗했으며, 걸음걸이, 언행,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단정했다고 한다. 외모에서부터 기품과 바름이 풍겨져 나왔다고 한다.
수정스님은 “인완 노스님은 혜옥 스님을 시봉하느라 대학도 가지 않았지만 실력이나 능력도 출중했다. 노스님은 오로지 기도, 간경, 강의, 공부하는 것 밖에 몰랐다. 목소리가 너무 좋아 염불을 하면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면서 무더웠던 한 여름에 지장기도를 하던 어느 날에는 무려 2시간씩 이어지는 기도에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였지만 노스님이 화엄경 강의를 하자 화엄신장 탱화에서 방광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날씨가 더운 데에도 신도들이 더욱 신심을 내어 용맹정진하여 하안거를 원만성취를 했다는 소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고 전했다. 글도 잘 쓰시고 붓글씨가 인쇄한 것처럼 쓰는 명필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그 인품을 쉬이 짐작해 볼 수 있다. 수정스님은 "우리 노스님은 아이들에게 베푸는 자비가 흘러넘쳤다. 노스님은 아이들이 오면 계단에 올려놓고 옆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앨범을 만들어 주었다. 몇 년 몇 월에 누가 데리고 왔다는 것부터 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 노스님은 1년에 3~4번은 사진을 함께 찍었다. 또한 아이들은 좋은 데에서 경험을 해야 한다며 많은 곳에 데리고 가셨다. 나는 아직 에버랜드, 식물원 이런 곳도 가보지 못했는데 노스님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곳에 꼭 아이들을 데려가셨다”고 전했다. 그렇게 인완 스님은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인완스님의 기도와 가피
손상좌 수정스님에 따르면 대휴사는 또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인완노스님이 기도한 것 중에 이뤄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한다. 열반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은 것이 딱 2가지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돌아가신 이후에 다 성취되었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는 주지스님 막내 조카 부부에게 10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10년째 아이가 없던 그 가정에도 노스님이 돌아가신 이후 꿈을 꾸고 나서 귀중한 아이를 드디어 얻게 되었다고 한다. 또 대휴사 관음전 부지를 사려고 30년을 기도했는데 돌아가신 이후 매입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