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희스님(法希, 1930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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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희(法希)스님은 대한민국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 중의 하나인 석남사에서 청정수행 가풍을 드높인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0 경북 봉화 출생
1954 봉화 홍제사에서 인홍(仁弘)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 홍제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5~1956 홍제사에서 2하안거 성만
1957~1968 석남사 총무 역임
1961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 석남사 심검당 선방에서 3년 결사
1971~1975 내원사, 약수암, 윤필암, 석남사 등 선원 안거 성만
1976~1984 석남사 주지 역임
1984~1992 석남사 안거 성만
1993~현재 석남사 선원장
2019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 법계 품수(2019.3.15.)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행지침 참선 정진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법안(法眼)·도헌(道憲)·명각(明覺)·현관(玄關)·현산(玄珊)·명관(明觀)·명덕(明德)·정혜(正慧)·정수(正受)·일공(一空)·원산(元山)·일엽(一葉)·일아(一雅)·구요(九曜)·일각(一覺)·공인(空印)·천강(千江)·천안(千眼)·중온(中蘊)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부영(扶榮, 6)→심공(心空, 7)→정자(淨慈, 8)→인홍(仁弘, 9)법희(法希, 10)→법안(法眼, 11), 도헌(道憲, 11), 명각(明覺, 11), 현관(玄關, 11), 현산(玄珊, 11), 명관(明觀, 11), 명덕(明德, 11), 정혜(正慧, 11), 정수(正受, 11), 일공(一空, 11), 원산(元山, 11), 일엽(一葉, 11), 일아(一雅, 11), 구요(九堯, 11), 일각(一覺, 11), 공인(空印, 11), 청강(淸江, 11), 천안(千眼, 11), 중신(中信, 11), 지우(智牛, 11), 진수(眞修, 11), 선현(禪炫, 11), 서하(瑞霞, 11)

활동 및 공헌

출가

법희(法希)스님은 1930년 음력 8월 21일 경북 봉화에서 아버지 권철연과 어머니 김자재행 사이의 4남 5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이름은 권선녀이며, 아호는 동관이다. 스님이 어렸을 때 집에 보살님 한 분이 자주 왔는데, 그 보살님은 집에 올 때마다 천수경을 외우곤 하였다. 그 영향으로 15세 되던 무렵 천수경을 다 외우게 되자 친구들은 스님을 처녀 보살이라고 불렀다. 스님은 24세 되던 해인 1953년 장 수술을 받고 6개월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승려가 되기를 발원하였다. 드디어 25세 때인 1954년 태백산 홍제사에서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인 인홍스님을 만나 은사의 연을 맺어 출가를 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자운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수행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렉시쏘모스님과 함께

1957년 은사 인홍스님이 석남사 주지로 수행 도량을 옮기시자 법희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석남사로 가게 된다. 1957년 28세 때 석남사에 온 뒤 게으름 없이 오로지 일관되게 참선공부를 하며 9년간 총무 소임을 보았고, 은사스님을 도와 석남사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스님의 나이 32세 때인 1961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 큰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계받았다. 그 뒤 여러 선방을 두루 다니면서 공부를 더욱더 굳게 다져나가며 운수납자 생활을 하였고, 39세 때인 1968년 석남사 심검당 선방에서 여러 스님들과 은사스님을 모시고 돈독한 신심과 초지일관으로 3년 결사를 단행하여 성취하였다.

  • 사진출처(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렉시쏘모스님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302

석남사 주지, 선원장 소임을 맡다

법희스님은 1976년부터 1984년에 이르는 8년 동안 석남사 주지로 소임을 살며 누각 보수와 정수원 중창 불사를 하였다. 또한 은사스님인 인홍스님께서 췌장 수술로 위독해지자 2명씩 4조를 짜서 21일 동안 능엄주 기도를 두 시간씩 간절히 올렸다. 기도의 가피력으로 은사스님이 쾌유 되기를 바라는 절실한 향심은 그 누구보다도 돈독하였다. 인홍스님을 도와서 오늘날의 석남사 기초를 다진 법희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심도 각별하여서, 지금도 인홍스님이 계시던 방을 그대로 지키면서 매일매일 생전의 은사스님을 생각하며 효행과 정진을 여일하게 하고 있다.

19993년부터 2022년 현재까지도 석남사 선원장 소임을 맡고 있는 법희스님은 오로지 참선으로 일관하며 선원장으로 후학들의 양성에 더욱더 심혈을 기울이며 자신의 공부도 게으름 없이 열심히 하고 있다.

스님은 2019년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를 품수했다. 수계제자로는 법안(法眼)·도헌(道憲)·명각(明覺)·현관(女關)·현산(玄冊)·명관(明觀)·명덕(明德)·정혜(正慧)·정수(正受)·일공(一空)·원산(元山)·일엽(一葉)·일아(一雅)·구요(九曜)·일각(一覺)·공인(空印)·청강(淸江)·천안(千眼)·중온(中蘊)·중신(中信)·지우(智牛)·진수(眞修)·선현(禪炫)·서하(瑞霞)스님 등이 있다.

석남사

석남사 대웅전

석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로서 석남산(石南山)이라고도 불리는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사찰이다. 이곳은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유명하며 가지산 보림사를 개종하신 도의선사가 헌덕왕 16년 (824년)에 창건하였다 한다.

도의스님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호는 원적(元寂)이며, 법호는 명적(明寂), 속성은 왕(王)씨이다. 선덕왕 5년(784년)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광부(廣府)의 보단사(賣壇寺)에서 비구계를 받은 도의스님은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지장(智藏)의 법맥을 이어받고 법명을 '도의’로 개명했다. 그 후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배우고, 헌덕왕 13년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했으나, 당시 경교(經敎)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는 풍조를 보고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길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陣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여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선(南禪)을 전수하다가 열반에 들었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진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6·25전쟁으로 완전 폐허가 된 것을 인홍스님께서 1957년 음력 4월 11일에 석남사 주지로 부임해 오면서 도량 중수 불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 시설을 중수 중창하고 나서 그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검당, 무진료, 상락료 등 당우를 중수 복원하여 23동의 당우가 들어서 석남사 대가람을 형성하였다. 이때부터 석남사는 비구니 정진 도량으로 각광을 받으며 항상 100여 명이 넘는 선객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행 정진하고 있다.

대웅전 옆을 지나서 백일홍이 피어 있는 옆길을 따라 가다 보면 도의국사 부도(보물 369호)가 있고, 후원 뒤뜰을 지나서 식당 옆 지하에는 돌구유(문화재 자료 157호)가 있는데, 지금은 채소와 음식물을 세척하는 물을 담아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중심 공간에 들어서기 전 산문을 겸한 침계루가 있는데, 이곳은 여름에 백팔대참회(百八大職)海와 저녁 예불과 법문을 듣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석남사 선원은 1967년 당시 주지였던 인홍스님이 퇴색한 가람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신축하여 정수선원을 전국의 비구니스님들의 참선 수행 도량으로 삼으면서 대표적인 비구니 선도량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1963년부터 이곳에서 연이어 3년 결사를 진행해오다가 1999년부터는 1년 결사에 들어갔다.

인홍스님은 1963년 선기가 수승한 납자들을 위한 수도 공간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끝에 심검당(尋劒堂) 선원을 신축하였다. 1995년 주지 도문스님은 수선 공간이 부족함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금당선원을 신축, 개원하여 많은 청풍 남자들을 받아들여 정진케 했으며 현재 이곳에서 1년 결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석남사 선원이 여법한 대표적 비구니 도량으로 면모를 거듭 새롭게 하여 가일층 선풍을 휘날리게 되자, 1999년 8월에 조계종 종립 비구니 특별선원으로 지정되었다. 석남사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은 정수선원, 금당선원, 심검당선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정수선원에서는 일반 정진, 금당선원에서는 결사 도량으로 가행정진, 심검당선원에서는 노스님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 앞으로 심검당에 무문관을 개설할 예정이다.

정수선원은 석남사 본당으로 종무소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원 앞으로는 조사전과 탑 1기가 서 있다. 선원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60평 규모인데, 큰방 뒤에 간병실과 창고, 정랑이 붙어있다. 큰방에서 대중 30여 명이 좌선 수행할 수 있으며, 몇 해 전까지도 여기서 수차례 3년 결사를 맺기도 하였다.

금당선원은 석남사 본절에서 우측으로 빠져 올라가면 모습을 드러낸다. 옛 동인암이 있던 자리로 1994년 동인암을 해체, 증축하여 선원을 만들어 현재 1년 결사를 하고 있다. 금당선원은 큰방, 목욕탕과 다각실을 겸한 요사, 정랑의 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당선원 큰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0명이 수행할 수 있다. 심검당은 석남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상선원으로서 특별선원이다. 공부가 순숙한 선중이 용맹정진하는 무문관 당우로 만든 것인데, 큰방에서 10여 명이 정진할 수 있다. 2004년 현재 불필스님 외 노스님들이 기거하면서 참선 정진하고 있다. 심검당 큰방 옆에는 요사채가 있어 다각실과 목욕탕으로 쓰고 있으며, 심검당 향좌측 앞쪽으로 정랑이 있다.

석남사 선원의 가풍은 안거 한 철을 나는 것이 아니라 3년 결사 원력을 세워 입제하는 것이다. 이렇듯 석남사 선원은 항상 납승들이 수선에 들고 있다. 석남사가 불교계의 주목을 받는 까닭은 이 같은 수행 가풍이 청규와 대중공의라는 불교 전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석남사 대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일부작 일일불식 (一日不作 一日不食)' 의 '백장청규'를 엄수해야 한다. 밭 갈고 논 매는 일에서부터 불공과 대중공양하는 일, 법당 청소, 도량 정비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이 돌아가면서 소임을 맡는다. 노스님을 비롯해 단 한 사람도 소임에서 제외되는 이가 없는 것은 인홍스님의 가풍이 지금껏 그 제자들에 의해서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공사(大衆公事)에 의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소임을 정하고 맡은 바 소임대로 직분을 다하며, 공사에 의해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석남사 선원의 가풍이다. 석남사 모든 선원에서는 새벽 예불 시 한결같이 108 예불 대참회를 하며, 공양 시간에 법공양을 거행하고 있다. 결제, 해제 시 대중스님들은 통도사로 가서 방장스님의 상단 법문을 듣는다. 1999년 하안거에는 선원장 법희스님, 유나 현묵스님, 입승 현공·현랑스님을 비롯하여 56명의 수선 납자가 세 곳의 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주지 영운스님이 선원을 외호하였다.

참고자료

매일신문, 조계종 비구니 스님 11명 명사 법계 품서식 봉행 (2019년)

http://news.imaeil.com/page/view/201903141627082383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희(法希)스님 본항목 법희스님(法希, 1930~) 法希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希,_193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희스님(法希)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법희스님(法希) 인홍스님(仁弘) ~의 수계제자이다
법희스님(法希) 봉화 홍제사 ~에서 출가하다
법희스님(法希)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법희스님(法希)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법희스님(法希) 석남사 선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선원장
법희스님(法希) 울산울주 석남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법희스님(法希) 안거 ~을(를) 성만하다 봉화 홍제사, 양산 내원사, 합천 해인사 약수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 울주 석남사 등

지도

  • 석남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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