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石友) 보화(普化)스님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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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俗姓)은 설씨(薛氏), 본관(本貫)은 순창(淳昌)이며 법호(法號)는 ‘석우(石友)’이고 법명(法名)이 ‘보화(普化)’로서 조계종(曹溪宗) 초대 종정(初代 宗正)을 역임하기도 한 석우(石友)는 경남(慶南) 김해(金海) 교동에서 신라(新羅)의 홍유(弘儒) 설총(薛聰 : ?~?)의 45세손(世孫)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불린 석우(石友)는 자방(子房)과 공명(孔明)의 학(學) 뿐만 아니라, 시서(詩書) 및 노장(老莊)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지리(地理) 및 의학(醫學)에까지 능통(能通)하였다고 함 30세에 이르러 석우(石友)는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은 채 7~8년을 운유(雲遊)하다가 우연히 부산(釜山)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에서『보조어록(普照語錄)』을 열람(閱覽)하던 중,


      三界熱惱 猶如火宅(삼계열뇌 유여화택)
      其忍淹留 甘受長苦(기인엄류 감수장고)
      欲免輪廻 莫若求佛(욕면윤회 막약구불)
      若欲求佛 佛卽是心(약욕구불 불즉시심)

      삼계(三界)[1]를 윤회(輪廻)하는 고통(苦痛)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오랜 고통(苦痛)을 받으려 하는가
      그 윤회(輪廻)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이란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깨친 바가 있어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門中)에 있구나." 하고는,


      심전(心田)에 티끌 개고 성천(性天)에 구름 여니
      춘산(春山)에 화소조가(花笑鳥歌)하고
      추야(秋夜)에 월백풍청(月白風淸)이로다.
      아마도 무위도락(無爲道樂)은 이 밖에 다시 없어.

라는 시조(時調) 한 수(首)를 읊은 후에 출가(出家)의 뜻을 굳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38세에 금강산 장안사(金剛山 長安寺)의 연담 응신(蓮潭 凝信)을 은사(恩師)로 낙발(落髮)하였고, 유점사(楡岾寺) 동선 의정(東宣 義淨)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사방(四方) 선지식(善知識)을 널리 참방(參訪)한 지 20여 년에 영원암(靈源庵)에 머물렀다. 중일사변(中日事變)이 일어나자 법제(法弟) 상월(霜月) 율사(律師)와 함께 하동(河東) 칠불사(七佛寺)로 옮긴 석우(石友)는 인근의 사천 다솔사(泗川 多率寺)로 다시 이거(移居)해 있던 중 광복(光復)을 맞았고, 그 뒤 다시 남해도(南海島)로 건너가 해관암(海觀庵)을 창건(創建)하고는 그곳에서 한국전쟁(韓國戰爭)을 겪은 다음에 해인사(海印寺)로 옮겼으며, 1955년 8월 중망(衆望)에 의해 초대 종정(初代 宗正)에 추대(推戴)된 석우(石友)는 3년간 재임하면서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에 힘을 기울이다가 1958년 대구(大邱) 동화사(桐華寺)로 이석(移錫)했다. 세연(世緣)이 다 되어 임종(臨終)에 다다른 석우(石友)에게 시봉(侍奉)이「유게(遺偈)」를 청하자, 석우(石友)는 소리를 높여 “망상(妄想)을 말라.”는 한 마디를 내렸으며, 그래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시봉(侍奉)의 간청에 석우(石友)는 부득이 “그러면 네가 나를 붙들어 일으켜라. 너를 위하여 게(偈)를 지으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다음의「임종게(臨終偈)」를 남긴 채, 세수(世壽) 84세ㆍ법랍(法臘) 45년에 안연(安然)히 입적(入寂)했다.


      「임종게(臨終偈)」
      襄括乾坤方外擲(양괄건곤방외척)
      杖挑日月袖中藏(장도일월수중장)
      一聲鍾落浮雲散(일성종락부운산)
      萬疊靑山正夕陽(만첩청산정석양)

      건곤을 모아 주머니에 담아 밖에 던져 버리고
      해와 달을 지팡이에 끼워 소매주머니에 감추고
      한 종소리 나니 구름이 흩어져
      만첩청산이 정녕 석양 같구나.

출처: [박성일의 역사문화사전] 석우 보화(石友 普化 : 1875~1958) 대종사(大宗師) https://blog.naver.com/geochips/130004956734

  1.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